마지막 4중주와 2인자의 삶


마지막 4중주 2인자의 의연함

영화 ‘마지막 4중주’를 보았을 때,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의 분위기를 알게 되었다. 마이너리티적인 삶을 살고 있는 나로서는 2인자의 삶을 새삼스럽게 되돌아보았다. 이후에는 그룹사운드 연주를 볼 때도 세컨드 기타 연주를 관심 있게 보는 편이다.

예술의 신 뮤즈

뮤즈(Muse)는 예술의 神이다. 많은 이에게 창의력을 안겨주는 뮤즈는 비단 예술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프로와 아마추어라는 표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뮤즈의 표현은 정적인 뮤지엄(Museum, 박물관)과 동적인 뮤직(Music, 음악)이라고 할 수 있지만 뮤즈의 끝장왕은 역시 대중적으로 폭넓은 ‘뮤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그림 취향과 음악 취향이 다른 편이다. 그림에서는 사실주의 화풍보다는 붓 터치가 느껴지는 인상주의와 색채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야수파의 화풍을 좋아한다. 음악의 경우는 반대 취향이다.

그룹사운드의 숨은 보석

오리지널 앨범과 싱크로율 100%에 가까운 노래와 연주를 좋아한다. 싱어의 창법은 개성을 선호하는 인상주의라 구분하고, 세시맨의 연주는 리듬에 충실하는 사실주의라 구분했을 때 1인자인 싱어보다는 2인자인 세시맨에게 더 관심이 간다는 이야기다.

한때 일요일 저녁이 되면 그룹사운드의 연습장을 찾아 전자음악을 즐겼다. 나의 마지막 샐러리맨 시절의 직장 OB들로 구성된 아마추어 그룹사운드였는데, 연습장에 가면 드럼과 강렬한 전자음은 언제나 내 마음을 정화해 주었다.

그룹사운드 연주를 볼 때는 세컨드 기타 연주를 관심 있게 본다. 거창하게는 2인자의 삶을 헤아리면서 말이다. 다양한 세상사에서 누군가에게 버팀목(배경음악)이 되는 삶은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4중주와 2인자의 삶 1
영화 <마지막 4중주> 포스터

영화 마지막 4중주

영화 ‘마지막 4중주’ (A Late Quartet , 2012년)를 감명 깊게 본 적이 있다. 퍼스트 바이올린과 세컨드 바이올린의 심리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영화이기도 했다. 현악 4중 주단에서 멘토 역할을 하던 첼리스트가 파킨슨병을 앓게 되면서, 네 명의 단원들 사이에 그간 억눌려온 감정들이 드러난다.

어쩌면 이대로 해체될지도 모르는 위기의 상황에 이르렀다. 영화는 우여곡절 끝에 대체 첼리스트까지 투입을 하며 마지막 연주로 해피엔딩이 되는 내용이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의 복잡한 감정을 처음 알게 되었다. 즉, 1인자와 2인자의 보이지 않는 경쟁이었다. 마이너리티적인 삶을 살고 있는 나로서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뭔가 답답하고 씁쓸하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현실이었다.

현악 4중주의 구성

현악 4중주는 제1바이올린,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로 구성되어 있다. 어느 책에서 읽었던 내용인데, 현악 4중주 4명의 구성원을 농담이라는 전제로 이렇게 설명했다.

바이올린 연주를 빼어나게 잘하는 사람(제1바이올린)과, 곧 빼어나게 잘할 사람(제2바이올린)과, 한때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사람(비올라)과, 바이올린 연주를 아주 싫어하는 사람(첼로)이 모였다는 농담이었다. 말은 농담이라고 했지만 세상史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미묘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 에서는 개츠비가 위대했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중용의 미덕을 보이며 사색하는 캐러웨이 닉의 모습이 더 위대했듯이 말이다.

버팀목이 되는 삶은 아름답다

2인자에게도 어느 책의 제목처럼 “누군가에게 버팀목이 되는 삶이 아름답다” 라는 진정성은 존재한다. 아무리 세상이 나를 속일지라도 나는 그런 진정성을 믿고 사랑한다.

이런 분위기에 어울리는 악기로는 첼로와 비올라 아니겠나 싶다. 오늘은 그저 2인자로만 느껴지는 비올라 연주를 감상해 볼까 한다. 비올리스트 용재 오닐의 연주로 섬집아기를 감상해 본다. 우주센터가 있는 내 고향 나로도를 그리워하며.

용재 오닐의 섬집아기 듣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