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의 행복 오후의 고독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 무도회
마음이 정체되고 진부한 일상이 반복될 때 우리는 마음을 닫게 된다. 자기정화 모드로 태세 전환을 하는 것이다. 이런 날에는 돌파구를 찾아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영화나 음악을 감상하기도 하고, 식도락에 빠지거나 긴긴 잠을 자기도 한다. 내 경우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도록을 펼친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아침 일찍 눈이 뜨였다. 미술관을 찾아가 조용히 그림 감상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감기 기운을 지닌 불청객이 나를 찾아왔기에 외출을 자제해야 하는 안타까움이 나를 슬프게 했다.
환자의 마음을 위로하는 그림은 어떤 작품이 좋을까. 아마도 행복과 기쁨만을 위해 그림을 그렸던 마티스와 르누아르의 작품이 아닐까 한다. 이중에서 르누아르 작품을 좋아한다. 실제 원자력 병원의 복도에는 르누아르의 작품 방을 만들어 놓았다. 르누아르 작품에서 강한 긍정의 기운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이지 싶다.
어느 해, 르누아르의 작품을 감상했다. 내가 좋아하는 <물랭 드 라 갈레트>를 비롯해서 <시골 무도회>,<도시 무도회> 작품이 모두 전시되어 무척이나 즐거운 마음을 향유할 수 있었다. 특히 <시골 무도회> 와 <도시무도회> 작품에서는 르누아르의 장난기가 느껴져서인지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그때 구입한 도록을 꺼내 들었다. 시골 무도회의 여성 모델은 르누아르의 부인이었던 알린 샤리고이고, 도시 무도회의 여성 모델은 백색의 화가 위트릴로의 어머니인 수잔 발라동이다. 도시 무도회는 격식을 갖춘 딱딱한 분위기이고 시골 무도회는 서툴지만 살가운 분위기였다.
르누아르는 자신보다 스무 살이나 어렸던 알린 샤리고를 수잔 발라동 보다 덜 세련되게 그렸다. 이에 반해 한때 르누아르의 연인이기도 했던 수잔 발라동은 실제보다 미화하여 세련되게 표현하였다. 이런 분위기가 시골과 도시의 차이라기보다는 ‘아내와 여친’의 차이인가 싶어 남자의 불편한 진실을 느끼게 한다.
르누아르는 금수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흙수저도 아니었다. 르누아르에게는 이런 구별 자체가 의미 없다.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자기 정화를 하며 평생 아름다운 분위기의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르누아르를 마티스와 더불어 인생의 기쁨을 노래한 화가라고 하는 모양이다.
베빈다 다시 스무 살이 된다면
오늘은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하지만 오전 날씨는 화창했다. 오후에는 비가 내리기를 갈망했다. 비가 내리면 창 넓은 찻집에서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곳에 멍한 시선을 두고 상념에 잠기는 아스라한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어서였다. 오후 들어 한 줄기 소나기는 내렸지만 이내 강한 햇살의 영향으로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서운한 마음에 하는 수 없이 바다를 느끼게 하는 음악을 들으며 오후를 보냈다.
바다를 운명처럼 끼고 사는 남도의 섬마을과 유럽의 항구도시에는 공통적인 음악이 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여성들의 삶 속에 파고든 서편제와 파두 음악이다. 남도의 서편제는 태풍이 불면 줄초상을 겪는 섬마을 사람들의 한(恨) 서린 음악이다. 코르시카 음악은 항해를 떠난 남자들이 망망대해에서 듣는 음악이지만, 파두 음악은 긴 항해를 떠난 남자들을 여자의 숙명으로 기다리는 고독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파두 음악 중에 베빈다의 “다시 스무 살이 된다면” 이 있다. 제목에서부터 회한이 서려있다. 멜라니 샤프카와 비슷한 성량을 지닌 베빈다의 독특한 바이브레이션에는 파두 음악의 숙명이 느껴진다.
다시 스무 살이 된다면? 다시 올 수 없는 스무 살의 청춘을 부러워할 수만은 없다. 보이지 않는 사회적 제약을 지닌 스무 살이 되기를 갈망하지 않는다. 차라리 기다림의 마음으로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중년의 활력을 찾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다만,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았던 Godot가 염려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도종환 시인의 if 라는 詩가 떠오른다.
기다릴 수 있고
기다림에 지치지 않을 수 있다면.
베빈다의 “다시 스무 살이 된다면”을 감상하며 다시금 if 詩를 음미해 본다.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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