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의 자유를 꿈꾸었던 비지네스만의 수수께끼


일탈의 자유를 꿈꾸었던 비지네스만의 수수께끼

일탈의 자유를 꿈꾸었던 비지네스만의 수수께끼는 일본 파견 근무에서 만났던 일본 친구의 이야기이다. 독특했던 비지네스만의 미지의 정체 그리고 그의 고독의 그림자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아름다운 후지산(富士山)의 만년설을 바라보며 6개월을 보냈던 실제의 이야기를 코믹콩트로 엮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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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의 만년설과 함께한 비지네스만

지각이 일상이라 아침 체조에는 참가한 적이 없고, 근무시간 내내 하품을 하고, 업무 외에는 동료와 사적인 대화가 거의 없고, 그저 퇴근 시간만을 기다리는 직원의 하루는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일본으로 직장을 옮긴 다음 해, 후지산을 끼고 있는 소읍으로 파견을 갔었다. 파리 시내 어디에서든 에펠탑이 보이듯, 마을 어디서든 후지산(富士山)의 만년설이 보이는 마을이었다. 포도주 제조로 유명한 마을이지만 특산물은 포도가 아닌 배였기에 야마나시(山梨)로 불리는 고장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한국인 선임 한 명과 프로그램 개발 차 6개월을 보냈다. 그때를 생각하면 독특했던 일본 직원이 생각난다. 나와 비슷한 연배였던 그와는 친구처럼 지냈다. 그를 부를 때는 일본식 영어 발음인 ‘비지네스만(businessman)’ 애칭으로 불렀는데 지금도 잊히지 않는 친구이다.

비지네스만의 독특한 근무 스타일

비지네스만은 방전된 신체 상태로 지각 출근을 한다. 그에게 근무시간은 열일보다는 모바일 충전처럼 신체를 충전하는 시간이다. 퇴근시간에 맞춰 신체 충전이 이뤄져 와이파이 신체 계기가 Full로 표시되면 그제서야 워밍업을 시작한다.

밤의 요정인 달맞이 꽃의 자태를 갖추고 힘찬 미네르바의 날갯짓을 시작한다. 흐릿한 동태의 눈에서 번득이는 눈빛을 지닌 참매의 눈초리로 변하는 것이다.

기무상(金さん), 저녁 시간 있나요?

라며 나에게 다가와 엄지 검지로 한잔 하자는 무언의 투수 사인이 나온다.

인터넷 용어도 없던 시절, 퇴근 후 기숙사에 가면 TV도 없고, 읽을 책도 없고, 친구도 없다. 하루 종일 함께 일한 ‘썰장이’ 선임과 다시 또 같은 방에서 지내야하는 위리안치형에 처해진다. 이러니 시간이 없다고 대답할 리 있겠나. 투수 사인이 거둬들이기도 전에 나 또한 엄지 검지로 ‘콜!!!’ 포수 사인을 보낸다.

후지산의 마을

비지네스만과의 유쾌한 일상

오늘도 비지네스만과 나는 후지산까지 드라이브로 기분전환을 한다. 간단한 저녁식사를 하고 일본식 Bar인 스나쿠(スナック)에 간다. 마마가 키핑 양주의 안주를 준비하기도 전, 비지네스만은 어느새 스테이지에 올라 마이크를 잡는다. 스나쿠 내에는 어김없이 ‘비지네스만~ 비지네스만~’ 샤우팅이 반복되는 오픈 송 팡파르가 울려 퍼진다.

그의 애칭이 ‘비지네스만’이 된 이유이다. 파견근무가 끝나고 도쿄로 돌아올 때까지도 ‘비지네스만’ 제목의 노래는 그의 가요 베스트 10 차트에서 인기가요로 굳건히 자리매김했다.

비지네스만은 외국인인 나를 친구처럼 살갑게 대했다. 개인주의와 배타성이 강한 일본인 치고는 의외였다. 그는 폭음가보다는 애주가 타입이었다. 술잔 건네는 분위기를 좋아했고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자리에 앉으면 조용한 분위기의 침묵을 좋아했다.

비지네스만과 선임의 취향

파견근무 초기에는 선임과 나를 동시에 초대했었다. 선임은 술을 전혀 못 했기에 술잔 건네는 분위기를 몰랐다. 대신 일본어가 유창한 달변가였고 노래를 아주 잘 불렀다. 특히 요시 이쿠죠(吉幾三)가 부른 ‘사케요(酒よ)’를 조영남의 LIVE 바이브레이션 이상으로 감칠 나게 잘 불렀다.

선임의 노래 실력은 노래 좋아하는 비지네스만에게는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은근한 라이벌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두 사람의 배틀이 시작되면 팬텀 싱어의 열기로 가득 찼다. 나의 존재는 두 사람의 배틀이 끝나야만 감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배틀이 끝나면 선임은 오렌지 쥬스 한잔만으로 1시간 이상 썰을 풀었다. 우리가 원하지도 않고 국민은 더더욱 원하지도 않은 필리버스터를 이어가는 느낌이었다.

수학을 전공했던 선임은 정비례와 반비례의 법칙을 확실히 보여 줬다. 썰은 노래에 정비례했고 술은 노래에 반비례했다. 썰과 술은 정비례해야만 술좌석이 즐거운 법이다. 우리가 술을 마시는 이유가 뭔가. 나누는 술잔 사이로 덕담과 인기발언을 남발하며 주당들의 공감대를 도출하려는 것이 아니던가.

즉, 너와 나의 인간관계라는 이차방정식의 근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주당들이 쏟아 내는 이슈는 x축과 y축이 만나는 실근이어야 했지만, 선임의 술좌석의 분위기는 x축과 y축이 결코 만날 수 없고 결과를 낼 수 없는 허근이었다.

실근이 아닌 허근으로 선임 혼자만의 필리버스터를 이어가니 술잔을 건네는 즐거움이 없어 장진주사의 흥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이는 수학 전공자도 반드시 철학 전공도 해야 하는 고전 논리철학을 간과했기 때문일 것이다.

비지네스만의 입장에서는 우리에게 투자하는 술값의 대차대조표를 틀림없이 산출해 보았을 것이다. 자신이 투자한 무대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닌 선임이라는 손익계산서가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초대받은 선임 또한 자신의 취향과 술좌석의 분위기를 파악해 보았을 것이다.

선임의 입장에서는 대화 없이 술잔만 건네는 비지네스만이 자신의 페이스메이커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결국, 언젠가부터 선임과 비지네스만은 더 이상 함께 술자리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서로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서로의 취향이 다르기에 시나브로 멀어진 것이다. 세상사는 이처럼 안 좋은 상황에서도 둘의 이해타산이 묘~하게 맞아떨어져, 윈윈으로 아름답게 헤어지게 되는 형국이 되었다. 신기하지 않은가?

이후 비지네스만은 나만을 찾았다. 나 또한 선임의 질투와 눈총을 받지 않고, 칼퇴 후 후지산 드라이브와 한잔의 시간으로 즐겁게 보낼 수가 있었으니 비지네스만의 유혹을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섬찟한 미지의 정체

그러던 어느 날, 비지네스만에게서 섬찟한 느낌이 찾아들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왜 나만 상대하지? 사무실에 시크한 여직원도 여럿 있었는데 왜 이성과는 교제가 없는 거지? 스나쿠 바에 가도 마마나 여성 바텐더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말도 섞지 않았다.

애창곡 퍼레이드가 끝나면 나 하고 조용히 술잔만을 건넬 따름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갑자기 소름 끼치는 상상이 시작되었다. 나에게 커밍아웃을 하며 퀴어축제라도 함께 가자고 하면 어떻게 하지?

사실이라면 나는, 내 밥줄을 만들어준 컴퓨터계의 위대한 선구자 앨런 튜링처럼 동성애의 죗값으로 화학적 거세를 당하고, 애플사 로고처럼 독이 든 사과를 한입 베어 먹고 자진(自盡)을 해야 하나? 아니면 사마천처럼 궁형을 받고 역사서를 써야 하나?

팩트 체크를 위해 서툰 일본어를 연습해서 긴 문장의 질문을 준비했다. 한마디로 여친은 있는지, 언제 결혼할 것인지를 물었다. 무표정한 그의 대답은 평범했다. 아직 여친은 없지만 독신주의자가 아니기에 사랑하는 여성이 생기면 결혼할 것이라고 했다. 대답의 분위기로는 동성애자가 아님이 분명했다.

이게 다예요

추가로 준비한 질문을 이어 나갔다. 왜 나만 만나느냐고 직빵으로 물었더니, ‘난 기무상( 金さん)이 조용해서 좋아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곤 술잔을 들어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프랑스 ‘연인’의 작가인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사랑의 종결 명언을 연상케 하는 한마디를 했다.

이게 다예요.’

C’est tout……

립서비스로 들리기는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비지네스만은 나를 착각한 것이었기에.

나도 노래방에 가면 마이크 체질이 된다. 썰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은 타입이다. 그랬기에 한 곡이 아닌 메들리로 노래 부르고 싶었다. 필리버스터 이상으로 썰을 풀고 싶었다. 하지만 일본어가 서툴렀기에 불가항력으로 조용했을 따름이었다.

선임과 비지네스만은 서로 엇갈린 취향이 윈윈이 되어 상처 없이 자연스러운 손절이 되었다. 하지만 나와 비지네스만은 착각의 상황이 윈윈이 되어 나에게는 호감으로 작용한 것이다. 본의 아닌 세상사 신기할 수밖에.

‘이게 다’라는 비지네스만의 한마디에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더 이상 잔머리를 굴리지도 않았다. 그저 보이는 그대로 퇴근 후 주당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후지산 야경
후지산 마을의 야경

비지네스만의 고독과 생각의 심연

예정했던 6개월의 프로그램 개발이 끝나고 도쿄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그곳의 직원들과 아쉬운 작별을 나눴다. 그날 밤 비지네스만은 후지산 근교의 호수에 가자고 했다. 호수에 도착한 우리는 밤이 새도록 아쉬운 술잔만이 조용히 오고 갔다. 퇴근 후 우리의 즐거움은 항시 이런식이었고 ‘그게 다’였다.

일탈의 자유를 꿈꾸지만 새장에 갇혀 있는 듯한 요즘. 가끔 비지네스만을 생각한다. 그리고 수수께끼 같았던 그의 정체도 생각한다. 근태가 저리도 안 좋은 직원이 어찌 짤리지 않고 밤문화에 펑펑 돈을 쓰고 다녔을꼬. 혹시 그 회사를 이어갈 오너의 금수저 후계자였을까? 나에겐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그의 모습이 당시 나의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밤이 깊어 인적이 사라진 河口湖水에서 허공을 향한 비지네스만(일본직원의 애칭)의 고독스러운 표정이 떠오른다. 그의 고독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하다 그리고 찾아주고 싶다.“

일기
비지니스만의 심연을 생각했던 나의 일기

일본취업 6년의 비하인드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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