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꾸민 글의 결과
수필과 꾸민 글의 결과는 금방 흠이 보이게 마련이며 시들해진다. 가짜 글과 가공된 돌은 허용되지 않듯이 수필은 진실을 기반으로 하며, 꾸미지 않는 민얼굴이 아름다움을 안긴다.
[실전] 수필 쓰기 핵심
수석을 통해 본 꾸민 수필
수석은 자연석 감상을 원칙으로 한다. 따라서 아무 돌이나 취하지 않으며, 특히 가공한 돌은 범주에 넣지 않는다. 거기다가 질(質), 형((形), 색(色) 면에서 손색이 없고 적당한 크기와 심미안을 느끼게 해야 한다. 그리고 전면에서 보아 튀어나오거나 한쪽이 단절되지 않고 거부감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만 시각적으로도 좋은 수석이다.
수석에는 가공된 조석(造石)들이 있다. 어느 수석인이나 이를 가까이하거나 선호하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겉만 번드르르 하는 가짜 글을 좋아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모를 때는 건성으로 넘어가더라도 나중에 자신이 읽은 수필이 가짜 글인 것을 안다면, 결코 그 글에 호감을 느끼거나 옹호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가 가공해 만든 돌을 가지고 수석이라 우긴다면 공감할 것인가. 수필도 마찬가지이다.
가공된 조석과 가짜 수필의 문제
그런데도 여기저기 발표된 글을 보면 조석 같은 글을 적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더구나 그런 글을 좋은 글이라고 묵인하고 평가까지 해주는 걸 볼 때는 안타까운 생각마저 들 때가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수석은 절대로 손을 댄 돌을 취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 대전제이다. 출발 자체가 그러하다. 수필도 애초에 사실을 기초로 해서 진실을 담은 문학 장르로 출발했으므로 그 틀은 장르가 유지되는 한 반드시 지켜야 하며, 수필가는 그걸 수호할 책무가 있다. 왜냐하면 수필의 조석화(造石化)는 결국 진화된 발전이 아니라 혼돈을 초래하여 마침내는 근본을 망가뜨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꾸민 수필의 심각성과 문제점
그런데도 꾸민 글들이 버젓이 나돌고 그것을 지적하지 않고 묵인해 버리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글은 배추를 누가 가져가 주었는데 보니 거기에 배추벌레가 묻어와서 그것을 죽이지 않고 놔뒀더니 성체가 되어 날아가더라고 하고, 또 어떤 이가 쓴 글은 화분에 무슨 작은 몽우리 같은 게 보여서 몇 달을 두고 관찰했더니 그게 깨어나더라고 한 것도 있었다.
그러니까 이토록 벌레가 자라서 성충이 되고 나비로 탈피하여 떠나는 과정을 지켜봤다는 것이다. 과연 그게 가능했을까. 그토록 장기간의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봤다는 말일까.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여러 날을 지켜보았다면 거의 사육을 했다는 수준인데, 그게 가능하기나 할까. 나비 전문가도 아니면서 특별한 시설을 갖추지도 않는 곳에서 번데기가 날개가 돋는 과정을 보기가 쉬운 일일까.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는 없는 사실을 지어서 썼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수필의 진실과 수석의 조석화
그렇다고 보면 그런 글은 수필의 형식을 취하면서 없는 사실을 허구로 쓴 글이 아니겠는가. 당연히 조석이 전시장에 오르지 못하게 하고 있듯이 그런 글은 수필 광장에서도 반드시 솎아내야 할 것이다.
필자가 소장한 수석들 가운데, 특별히 바위형 수석을 아끼는 이유가 있다. 이 돌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여러 생각이 떠오른다. 왜냐하면,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서 가공하지 않는 돌인 까닭이다.
하지만 이 돌은 조금은 난해하다. 피카소의 그림처럼 물상이 바로 한눈에 들어오지 않고 볼록렌즈를 통해 볼 때처럼 이중 삼중 형상으로 변한다. 그래서 입석으로 보기도 하고 뉘어서 갯바위형으로 보기도 한다. 역시 수석은 조석(造石)이 아닌 것이, 흥취도 주고 싫증도 나지 않는다. 꾸미지 않는 민얼굴이 더 아름다움을 안긴다는 뜻이다.
꾸며서 쓴 글은, 얼핏 화려하고 짜임새가 있어 보일지 몰라도 금방 흠이 보이게 마련이며 시들해진다. 수석을 보면서 ‘꾸민 글’의 문제를 되짚어 본 것이다.
* 해당 내용은 임병식 저자의 [수필 쓰기 핵심]에서 해드림출판사의 허락하에 인용과 참조를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