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치열하게 쓰자
[실전] 수필 쓰기 핵심
수필 쓰기의 오해
수필은 누구나 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산문 형식의 짧은 글이다 보니 만만하게 대하기 일쑤이다. 그런 데는 아마도 그 범위가 서한에서부터 논설류까지 다양하여 그 중 하나는 자신 있게 쓸 수 있다는 선입견 때문인지 모른다.
수필의 진정한 어려움
다시 말하지만 수필은 아무나 쓸 수 있고 만만하게 대할 수 있는 글이 아니다. 모를 때는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듯이 쉽게 생각하고 뛰어들지만 쓸수록 어렵게 다가와 후회하는 경우가 있다. 흔히 결과가 좋은 것을 보고 울고 들어갔다가 웃고 나온다고 하지만, 수필만큼은 그와 반대로 웃고 들어갔다가 울고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치열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수필도 문학인데 어찌 만만하겠는가. 자기의 생각을 온전히 담아내야 할뿐만 아니라 문학성까지 갖추어야 하니 쉬워질 턱이 있는가.
미켈란젤로와 예수상
나는 수필을 생각하면서 한 예술가의 집념과 치열성, 열정을 떠올릴 때가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한 나그네가 예수상을 만들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게 되었다.
“당신의 창작은 참으로 위대하군요.”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대리석 안에 숨어 계신 걸 나는 그저 그분을 해방시켰을 뿐입니다.”
그 앞선 상황은 이랬다. 그가 어느 건축 현장을 지나는데 버려진 대리석이 있었다.
“왜 이 돌덩어리를 버렸습니까?”
“쓸모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바로 그 돌을 가져와 예수상을 깎아 놓았다. 쓸모없는 돌이 그의 예술혼에 의해서 걸작으로 탄생한 순간이었다.
소크라테스와 치열함
치열함을 말하자면 소크라테스의 실험정신도 빼놓을 수가 없다. 어느 날 그가 독배를 들면서 제자에게 매순간 일어나는 변화를 이야기했다.
“나의 발이 마비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다. 이번에는 완전히 발이 마비되었다. 그렇지만 나에게 없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위장이 마비되었다. 그리고 나의 손이 죽었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죽어가는 순간까지 자기 응시와 탐구가 얼마나 치열했던 것인가. 보통사람이 그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치열성만은 배워야 하지 않을까. 특히 진솔한 글을 써야 하는 수필가는 그런 자세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
실망하는 수필의 이면
우리는 많은 수필작품을 대한다. 나의 경우만 해도 이틀 걸러 수필집이 우송된다. 그러면 인사치레라도 몇 편은 읽어보게 된다. 그런데 실망스러운 것이 대부분이다.
단순히 책을 내기 위해서 쓴 듯한 글이거나, 자기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수단으로 대충 얼개만 엮었다는 의심을 풀기 어렵다. 이런 글을 두고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수필 작품의 요건
수필 작품이라면 몇 가지의 조건은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참신성이다. 어디서 본 듯한, 남들이 이미 알고 있는 평범한 이야기를 자기만 아는 듯한 글을 대하면 맥이 풀린다.
둘째는 겸손한 글이어야 한다. 자기만 아는 듯한 고상한 이야기, 노골적인 자랑까지는 아니지만 은근한 자기 뽐내기. 이런 글을 대하면 그 자리에서 그냥 책을 덮고 싶다.
수필가라면 잠수함 속의 토끼처럼 시대의 아픔이나 이웃의 불행에도 눈감지 말아야 한다.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 한동안 수필가들이 침묵한 것을 보고서 아쉬워한 적이 있다. 그래서 딴에는 제일 먼저 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글을 카페에 올린 바 있다.
수필은 자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도구가 아니다. 여러 사람과 더불어 보다 인간답게, 아름답게 살자는 문학 본연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에 충실해야 하지 않겠는가.
세 번째로는, 개성이 있어야 한다. 개성적인 글을 써내야 한다는 것이다. 노래 잘하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도 좋지만, 까마귀 울음 같은 탁성도 필요하다. 이런 개성이 어울려졌을 때 전체적으로 생동감을 유지하고 활력 넘치는 수필 세계를 펼쳐 보일 수 있다. 필자도 그 일원이 되고자 늘 개성 있는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 해당 내용은 임병식 저자의 [수필 쓰기 핵심]에서 해드림출판사의 허락하에 인용과 참조를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