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기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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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기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기억

한 때 백과사전하면 브리태니커였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한글번역판이 아닌 영문원서로 된 백과사전이었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독해능력 없이는 백과사전으로서의 효용가치는 낮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 백과사전이 서울의 부유층을 대상으로 판매가 잘되었고 급기야 세일즈맨의 전형이 되었고 각종 세일즈 신화를 낳기도 하였다.

1970년 중반으로 기억한다. 시골집 형님 앞으로 커다란 고급박스 소포가 하나 배달되었다. 소포내용물을 아는 듯한 형님께서 포장을 풀어가는 데, 형님의 얼굴에선 뭔가 무거운 표정이 느껴졌다. 풀어진 소포의 박스에선 맨 처음 지구본이 나오고 다음에는 영어회화 테이프가 간이 책꽂이에 꽂힌 채로 나왔다.

다음으로 표지가 검으면서도 금빛 글씨로 음각된 두꺼운 책이 여러 권 나왔다. 나 또한 책 내용이 궁금하여 두꺼운 책을 펼쳐보니 온통 영문으로 되어있었다. 알고 보니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세트였던 것이다.

고등학생이었던 내 눈에도 도저히 백과사전으로서의 제구실을 못할 이 책을 형님은 왜 사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알고보니 형님 친구 중의 한 분이 브리태니커 세일즈맨이 되어 고향에 내려와 술 한 잔 하면서 부탁을 하였기에 어쩔 수 없이 할부로 구입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한 동안 20여권에 가까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우리집 애물단지가 되어 방 한구석에 방치되는 신세를 면치 못했는데, 어느 날 방학 때 다시 시골에 가보니 그 책들이 보이지 않았다. 반품을 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타인에게 양도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당시의 브리태니커의 보급은 개발산업화 과정에서 배워야한다는 몸부림이었음을 부정 할 수 없다.

한창기와 그의 문화 애정

당시 한국에서 브리태니커 열풍을 일으킨 중심에는 브리태니커 초대 한국 지사장이었던 한창기 사장이 있었다. 그는 화려함 보다는 예스럽고 소박한 전통문화를 사랑했다. 전통문화 뿐만이 아니라 민중의 생활에도 관심이 많았다.

급격한 산업발전과 현대사회로 변해가는 와중에 소멸되거나 가볍게 넘기기 쉬운 민중문화를 지키고 발굴하는 데 한 평생을 보냈는 데, 사진작가를 대동해서 민중의 삶의 표정을 담느라고 전국을 누볐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

한글전용 가로쓰기 잡지인 “뿌리깊은 나무”와 “샘이깊은 물”을 창간하였고, 구전되어오는 판소리를 채보하고 칠첩반상기와 녹차와 찻그릇을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제대로 지어진 초가집이 있다면 깊은 산골까지 직접답사를 다녀오고, 구전가요 채보를 위해 그들과 몇 날을 함께 생활했고, 자신의 잡지에 게시할 문인들의 모든 원고를 우리말로 직접 퇴고를 하는 등 열정적인 삶을 이어갔다.

80년 신군부에 의해 아끼던 잡지가 강제폐간 된 뒤에도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잊혀져가는 민중의 소박한 삶을 담은 “한국의 재발견”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한 마디로 전통문화에 심취한 마니아 중의 마니아였다.

뿌리 깊은 나무
뿌리깊은 나무

한창기와 스티브 잡스의 공통점

미국에 스티브잡스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한창기가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선구자적이고 열정을 불태웠던 분이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도전적인 목적의식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스티브잡스는 현대사회의 IT의 패러다임을 바꾼 선구자였고, 한창기는 출판문화를 바꾸고 전통문화를 가꾼 선구자였다.

또한 심미안을 추구하는 미학적 디자이너였다. 그렇지만 둘 다 그들이 꿈꾸었던 결실을 이루지 못한 채 미완의 작품만을 남기고 생을 마감 하였다. 아쉬운 마음을 감출 길 없지만 두 사람 모두는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꿈들을 저승에서도 동분서주하고 있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한창기의 문화 사랑과 업적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도서관이나 박물관의 자료들을 손쉽게 검색할 수 있는 데, 내 눈에는 두 사람이 하늘에서 만나 한창기가 남긴 잡지와 전통문화들을 스티브잡스의 IT기술을 통해 교류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한창기, 비록 엄격함과 융통성에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미치지 않고서는 이루지 못한다’는 불광불급(不狂不及) 정신은 그의 문화사랑 만큼이나 앞으로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