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예술
가버린 청춘의 낭만
시골집의 서랍 한 구석에서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이 눈에 띄었다. 이 영화가 상영될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학창 시절에 본 영화 중에 가장 낭만이 있는 영화로 느꼈기에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는 테이프이다.
당시 내 눈에 비쳤던 영화 속 대학의 낭만은 생맥주와 테니스 그리고 청바지와 미팅이었다. 생맥주와 테니스는 지금도 마니아적인 내 취향이 되었지만 청바지와 미팅은 나와 전혀 인연이 없었다.
내 취향이 아니어서인지 지금껏 청바지를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었고, 미팅도 해본 적 없이 내 청춘은 그냥 그렇게 수돗물이 흐르듯이 밋밋하게 지나갔다. 너무도 아쉬운 청춘 시절이었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
VHS 테이프의 먼지를 털고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 낡은 화질과 동시녹음이 아닌 엉성한 더빙은 세월이 흘렀음을 새삼 느끼게 했다. 병태와 영철이 군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를 마친 후, 화면은 캠퍼스로 배경이 바뀐다. 이어서 철학과 교수의 강의가 이어진다.
“에~, 플라톤의 이론은 예술이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데 무용지물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론과는 아주 정반대가 되는 이론으로서, 플라톤이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데 예술이 무용지물이라고 극단적인 표현을 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으며,
그것은 예술이 그 본래의 목적을 달성키 위해서는 필요한 허구가 이상을 무용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당시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가 떠오른다. 교수의 강의 내용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은 들렸지만 강의 내용에 대해서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오늘 여러 번 테이프를 돌려가며 강의 내용을 필사해 보았다.
다시 들어보니 플라톤의 예술론이었지만, 허구가 이상을 무용화할 수 있다는 부연 설명 없이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로 끝났기에 생략된 의미를 되짚어 보았다.
교수의 강의처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지만 다소 상이한 철학을 지녔다. 크게 구분을 지어보면 플라톤은 머리(이데아)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슴(파토스)이다.
예술의 감정
플라톤은 예술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예술은 올바르지도 유용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예술은 실재(이데아)가 아닌 모방된 그림을 제시하며 사람을 타락시킨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인간이 이성에 의해서만 인도되어야 하는데, 예술은 이성이 아닌 감정에 의해 작용되며 인간의 감정을 불 지르며 사람을 타락시킨다고 했다.
즉, 예술은 감정에 영향을 주어 성격을 약하게 만들고 인간의 도덕적, 사회적 경계를 무너뜨린다는 것이었다.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예술은 당초 부르주아지의 것이었다” 라는 의미를 골똘히 생각할 때가 있다. 그리고 함께 생각하는 게 <구별짓기>의 저자 부르디외가 말한 아비투스다. 상류층이 일반인을 대할 때, 그들만의 의식과 행동을 고급스럽게 구별 짓는 아비투스의 이면에는 문화자본이 내면화되어 있다. 예술의 본질을 의심케 하는 코스프레이다.
예술 무용지물론
이는 플라톤이 염려한 예술의 무용지물론과도 관련이 있는 것일까? 오늘 모처럼 다시 보았던 <바보들의 행진>의 영화 속 철학 교수의 강의를 필사하면서 최진기 강사의 한마디가 생각났다.
최진기 강사는 한 때 “나는 일반인과 다른 최첨단의 포스트모더니즘을 학습한 지식인이야” 라고 구별 짓기를 하지 않았었나를 반성했다는 것이다. 나 또한 마음 무겁게 와닿는 말이다.
예술이란, 무용지물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평온함을 주는 휴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가버린 청춘이 예술의 삶 속으로 이어지면 좋겠다.
낭만이 깃든 청춘들의 대사
사족으로, 언제 들어도 미소를 짓게 하는 <바보들의 행진> 영화 대사가 생각난다. 영화의 시작 장면에서는 교수의 강의가 끝나고 곧장 미팅 총무의 대사가 다음처럼 이어진다.
“때문에~ 친애하는 철학과 1학년 여러분,
지난 1년 동안 외로움과 막걸리와 학점, 그리고 꿈틀거리는 욕망(?)에 주눅이 들어버린 철학과 여러분, 한 해를 마무리 짓는 마당에 있어서,
아니 참다운 대학생활의 시작을 위해서…
예술대 여학생들과 미팅을 하자는 것이 아~니~갔어~~~“
궁핍했어도 청춘의 추억은 즐겁다
비록 영화 대사로 듣는 수다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궁핍했지만 피 끓은 청춘의 그때가 새삼 떠올라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