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독고다이
김남조 시인의 ‘가난한 이름에게’ 詩句처럼
가난한 이름의 고독이 아니더라도, 이가 시린 겨울밤이 아니더라도, 노상 술을 마시는 남자들이 있다. 뫼비우스 띠를 돌고 도는 쓰디쓴 삼류 철학에도 거창한 결론은 있다.
오늘도 고독한 주당들의 마지막 건배잔이 허공에 모인다. 아쉬운 마지막 잔을 들고서 의기투합의 철학을 토해낸다. ‘인생은 독고다이!’ 라고.
정말 마지막 잔을 원하는 사람은 이때 말을 아껴야 한다. 괜히 마지막 분위기를 맞춘다고 ‘나도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겠소’와 같은 추임새를 넣으면 안 된다. 마지막 잔이 2차로 이어지는 빌미를 주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기에 말이다.
인생은 독고다이
‘인생은 독고다이’ 라는 외침은 현실적 삶의 형태이고, ‘무쏘의 뿔처럼 혼자 가겠소’ 라는 추임새는 이상적 삶의 형태이다. 전자는 타인의 기대나 평가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고, 후자는 쾌락과 욕망에 묶이지 않는 사람이다.
두 철학은 비숫하면서도 약간의 뉘앙스 차가 있다. 이 미묘한 차이가 삼류 철학자에게 2차의 빌미를 준다는 것이다.
‘독고다이’ 라는 외침은 이소크라테스派와 같은 오묘~하지만 ‘현실적 친근한 느낌‘으로 대단한 결론을 얻은 듯한 긍정의 분위기가 감지되지만, ‘무소의 뿔’ 이라는 추임새는 소크라테스派와 같은 미묘~한 ‘추상적 꼰대적 느낌‘에 닭살이 돋는 듯한 부정의 분위기가 감지된다.
소크라테스와 이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와 이소크라테스는 이름은 비숫하지만 사상과 성격은 달랐다. 아테네의 유명한 철학자와 웅변가였기에 서로 간 파벌이 생겼듯이, 괜한 추임새 때문에 두 파벌의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 분위기에 따라서 또는 대화의 내용에 따라서 보이지 않는 파벌이 이렇게 생기게 된다. 페르소나와는 차원이 다른 타인과의 상호작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추상적 소크라테스派를 보내고 현실적 이소크라테스派의 의기투합이 다시 시작된다. 그래서 또 2차 뫼비우스 잔은 자정을 넘어 돌고 또 돌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내 이야기였다.
작가 미멍의 쿨한 박력
중국의 여류작가인 미멍의 글과 말빨이 생각난다. 치사한 세상에서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사는 법이란, 합리적 이기주의로 냉혹한 세상을 쿨하게 압도한다, 라는 미멍의 철학에서 ‘쿨한 박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근데 ‘이기주의’라는 표현이 망설여진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아직 나에게 남아있어서인데 그냥 공리주의 분위기로 두리뭉실 넘어가야겠다.
공리주의는 행복의 쾌락에 방점을 둔다. 다만 벤담의 양적 쾌락이냐 밀의 질적 쾌락이냐의 차이다. 어느 쾌락이 중요하고 안 하고는 의미가 없다. 둘 다 개인의 취향이고 각자가 느끼는 행복은 같을 것이니까.
나의 인생 독고다이
나의 인생 독고다이는 이기주의가 아닌 개인주의로서의 정체성에 방점을 찍으며 소크라테스派가 되어 술좌석을 뜬다. 네온사인에 부조된 허황한 거리를 거니는데, 노랫말이 아름다운 박선주의 ‘귀로’가 내 귓가로 흘러드는 듯하다.
“화려한 불빛으로 그 뒷모습만 보이며
안녕이란 말도 없이 사라진 그대
쉽게 흘려진 눈물 눈가에 가득히 고여
거리는 온통 투명한 유리알 속
그대 따뜻한 손이라도 잡아 볼 수만 있었다면
아직은 그대의 온기 남아 있겠지만
비바람이 부는 길가에 홀로 애태우는 이 자리
두 뺨엔 비바람만 차게 부는데
사랑한단 말은 못 해도 안녕이란 말은 해야지
아무 말도 없이 떠나간 그대가 정말 미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