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자유로움 따로 또 같이


취향의 자유로움 따로 또 같이

한때 “맴도는 얼굴”이라는 노래를 대중에게 알린 뮤지션이 있었다. “따로 또 같이” 라는 포크그룹이었다. 따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같이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는 의미로 만들어진 포크그룹이었다. 난 노래 외에도 이들의 그룹 이름을 좋아했고, 지금까지도 내 생활 철학을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하는 그룹이기도 하다.

무료함의 권태

친구들이 하나둘 직장에서 은퇴를 하기 시작한다. 가끔 은퇴한 친구를 만나면 인사처럼 나누는 친구의 첫마디가 있다.

요즘 재미있는 일 없느냐?’ 이다.

무료함의 권태가 느껴진다.

따로 또 같이 모임

시골 친구들에게서 모임을 만들자는 제안이 가끔 온다. 이때 나의 대답은 ‘따로 또 같이’ 다. 이는 모임 제안에 대한 거절의 변(辯)이기도 하다.

친구들의 섭섭함이 없을 리 없지만 모임을 만들면 언제나 함께해야 한다는 전제가 나는 달갑지 않다. 친구라고 언제나 같이 행동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아싸 성향인 나로서는 가끔씩 만나 서로의 안부를 나누는 것도 우정을 나누는데 문제가 없다. 모임이 필요하면 필요한 친구끼리 만들면 되는 것이다.

번개팅을 선호하는 이유

대신 흔히 말하는 번개팅은 좋아한다. 나에겐 번개팅이 더 즐겁고 스릴이 있다. 약속이라는 것은 상대방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번개팅은 제안자의 일방적인 결정이므로 면피성 거부 핑계를 만들기에 서로간 부담이 적다.

즉, 모임을 만들어 불참하게 되면 회원 간에 서운함이 쌓이지만, 번개팅은 피치 못할 상황에서는 불참을 해도 서운함이 크지 않아서다. 거창하게 말하여 만날 인연이 있으면 만나고 없으면 못 만나는 자유로움이 있는 것이다. 궤변이라면 궤변이다.

부부의 따로 또 같이

부부에게도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관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부부애를 위한 ‘따로 또 같이’의 분위기를 아내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아내는 휴일이면 사우나에서 피로를 풀고 집에서 조용히 드라마 보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비어있는 시골집을 가거나 카페에서 독서하는 것을 좋아한다. 집안 행사가 없는 휴일이면 각자의 취향대로 움직이는 편이다.

그렇다고 항시 따로따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아내가 원하면 함께 드라이브를 가고, 내가 보고 싶은 드라마가 있으면 아내와 함께 TV를 본다. 술을 전혀 못 하는 아내지만 맥주펍에 함께 가면 나는 맥주를 마시고 아내는 안주를 먹는다. 산책은 둘 다 좋아하는 공통 취향이라 저녁 식사 후에는 어깨를 서로 맞대고 인근 공원을 자주 걷는다

우리는 은퇴 후에도 각자의 취향대로 ‘따로 또 같이’ 움직일 것이다. 부부 일심동체니 부창부수니 하는 타입의 잉꼬부부는 결코 아닌 것이다.

은퇴 생활과 개인주의적 성향

나는 팬데믹을 거치며 1인기업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일감이 많이 줄어 들었기에 업무도 줄어들었다. 줄어든 빈 시간에 나는, 업무 외적으로 생산적인 일을 한다. 인터넷 상에서 비대면 AI 관련 라벨링을 하기도 하고, 구글 애드센스 글쓰기를 한다. 그래도 남은 시간에는 예술과 문학을 즐긴다. 이처럼 비대면 업무는 은퇴 후에도 내가 자유롭게 선택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기에 무척 다행스럽게 여긴다.

얼마 전, 은퇴한 친지들과 대화를 나누었을 때였다. 은퇴 후에 외롭고 고독하다는 것은 이해되지만 왜 무료하고 심심해하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했다.

나에게 돌아온 대답은 온통 부정적인 견해였다. 내가 일반적인 성향이 아닌 개인주의적 성향을 지녔고, 정으로 어울리는 우리 정서에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성향이라는 것이다.

내가 아직 은퇴를 하지 않았기에 은퇴자의 무료함을 실감하지 못한다는 것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개인주의 취향을 이기주의 취향으로 보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생산적인 슈필라움의 철학

모든 은퇴자가 무료해하는 것은 아니다. 무료함은 은퇴 전에도 있었다. 무료함을 호소하는 이면에는 반복되는 일상이 어제와 오늘이 늘 같았던 것이다. 주체적 취향이 필요하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이 강조한 ‘슈필라움’도 이와 같은 맥락이리라.

취향은 논쟁거리가 아니다. 개인적 취향이 있어야 비슷한 취향끼리도 만날 수 있다. ‘따로’ 향유하는 생활 속에서 ‘함께’ 하는 생활로 반복하는 것이다.

‘따로 또 같이’를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박경리 작가의 한마디가 떠오른다.

삶이란,
사람과 더불어 혼자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