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전사 폐사지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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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사 폐사지를 찾아서

진전사 폐사지를 찾아 나 홀로 동해안 여행을 떠난다. 항시 궁금했던 폐사지 분위기를 상상하며 답사자의 답사 단계를 떠올려 보는 여정이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의 숨결과 창건자 도의선사의 진보적 禪의 의미도 함께 생각해 보는 여행이다.

문화유산 답사의 단계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처음 읽은 것은 1999년 6월 4일 도쿄 우에노(上野)의 숙소에서였다. 일자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책 표지에 메모를 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답사자의 답사 단계에 대한 내용을 흥미 있게 읽었다. 사찰의 경우 경주 불국사 정도는 초급 과정이고, 강진 무위사 정도는 중급 과정이라고 했다. 즉, 입장료가 있는 곳은 초급자 코스이고, 입장료가 없는 곳은 중급자 코스라고 했다.

그러면 상급자 코스는 어디일까? 성질 급하게 다음 문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상급자 코스는 절도 중도 없는 ‘폐사지’ 라고 쓰여 있었다.

폐사지의 신비

폐사지가 있는 곳은 비포장도로가 많다고 한다. 교통편이 자주 없기에 날씨가 좋으면 흙먼지 뒤집어쓰고 걷고, 비가 오면 그곳까지 운행하지 않으려는 운전기사에게 눈총을 받아가며 찾아간다고 했다. 고급자 코스에는 전문 지식 외에도 답사지까지 찾아가는 애로사항을 극복하는 투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상급자 단계에 관계없이 ‘폐사지’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절도 중도 없는 폐사지는 어떤 분위기일까. 직접 체험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도쿄에서 근무한 관계로 훗날을 기약할 따름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IT회사를 창업하고 몰입하다 보니 다시 또 10여 년이 흘러버렸다. 그러던 중 동해안 여행의 기회가 왔다. 잊고 있었던 상급자 코스라는 진전사 폐사지가 떠올랐다. 상급자는커녕 중급자도 못 되는 내가 그곳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진전사 폐사지를 찾았던 이유

광주에서 먼 거리인 강원도 진전사 폐사지를 굳이 찾아가는 이유가 있었다. 상급자 단계에 대한 삐딱한 마음은 아니었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경산에서 태어났지만, 이곳 광주 무등산 자락에서 자라 14세 때 출가하였던 절이 진전寺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요즘 우리나라는 어디를 가도 사방팔방 길이 잘 뚫리고 도로포장도 잘 되어 있다. 한때는 버스에서 내려 다시 십 리 길을 걸어야만 당도할 수 있다는 진전사였다. 하지만 내비게이션 도움으로 직접 승용차를 운전하여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휴게소 휴식을 포함하여 광주에서 5시간 거리였지만 말이다.

진전사 폐사지와 삼층석탑의 특별한 순간

책으로만 상상하던 진전사 폐사지에 있는 삼층석탑이 저 멀리 시야에 들어왔다. 스탕달의 신드롬까지는 아니었지만 손바닥에 땀이 배고 서서히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통일신라 후반기의 작품을 직접 어루만져 볼 수 있다는 흥분이었다.

800여 년에는 일연도 이 삼층석탑을 만져 보았으리라는 시간적, 공간적, 감각적 스킨십의 흥분이었다. 비록 주춧돌만 외로이 남은 진전사의 폐사지였지만 의외로 황량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인적이 없는 폐사지 주춧돌에 걸터앉았다. 두 눈을 아스라이 뜨고 진전사 터를 닦아 중창을 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어 세월이 흘러 인적이 끊겨 폐사지가 되어가는 모습을 초배속으로 replay 하는 상상을 했다.

폐사지와 이데아론

눈에 보이는 모든 형상은 다 사라지고 결국 이데아만 남는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불쑥 찾아들었다. 후설의 현상학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나의 마음이 있었기에 生의 허무함은 어느 정도 달랠 수 있었다.

마침 국보로 지정된 삼층석탑을 관리하러 나온 어르신을 만났다. 진전사 폐사지에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화재를 관리해 주셔서 고맙다는 말을 건네자, 어디서 왔느냐고 묻더니,

문화재는 스스로 관리하는 마음을 가져야지!

하시면서 발길을 돌린다.

다시 석탑의 요모조모를 살피는데 등 뒤편 도랑에서 시원한 물줄기 소리가 들린다. 뒤돌아보니 문화재를 스스로 관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어르신께서 시원스레 배뇨하는 소리였다.

진전사 폐사지와 석탑
진전사 폐사지와 석탑

진전사 폐사지와 도의선사

강원도 양양에 위치한 진전사 폐사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절이었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도의선사가 신라에 선종을 전파하기 위해 창건했는데, 임진왜란 이후 폐사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폐사지에는 주춧돌과 국보 제122호인 진전사지 삼층석탑만 꿋꿋이 남아 있다.

현재의 진전사는 폐사지에서 10여 분 거리에 새로이 지어졌다. 현대 시멘트 공법과 21세기 구조물로 만들어진 진전사의 법당에는 오래 머물 이유가 없었다. 도의선사 부도를 찾았다. 도의선사의 진보적 禪의 의미와 부도의 역사적 가치를 헤아리는 게 나에겐 더 의미 있는 일이었다.

폐사지 답사의 마무리

가만, 진전사 폐사지를 답사했으니 나도 이제 상급자인가? 비 오는 날 비포장 도로의 버스기사 눈총 대신에, 오늘은 도의선사와 일연의 따끔거리는 눈총이 느껴진다. 그래도 폐사지의 분위기를 황량하게 느끼지 않고 오랜 시간 충만한 상상을 했다. 나에게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 언젠간 다시 한번 찾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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