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봉 없이 오케스트라 연주가 가능할까


신년 오케스트라 음악회

매년 새해가 되면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가 열린다. 특히 위성을 통해 세계 각국으로 중계되는 실시간 실황 연주는 단연코 인기가 높다. 극장 스크린을 통해 이곳 광주에서도 실시간 연주를 감상할 수가 있는데, 코로나 이후로는 스크린 중계 예매를 하지 못해 아쉬웠다.

사이먼 래틀의 고별 지휘

지금까지 스크린 위성중계 중에 두 가지 연주회가 기억에 남아 있다. 고별 지휘를 했던 사이먼 래틀과 바렌 보임이 지휘할 때였다. 2018년 신년음악회는 사이먼 래틀의 고별 지휘였는데 앵콜곡으로 지휘했던 드보르작의 멜랑꼴리한 <슬라브무곡>이 무척이나 서글펐다. 이후로는 추운 겨울이 되면 <슬라브무곡>을 자주 듣는 편이다.

드보르작 슬라브무곡 듣기 ☞

바렌보임의 지휘 퍼포먼스

다음 해인가 바렌보임이 지휘를 하였다. 바렌보임하면, 아내이자 비운의 첼리스트였던 자클린 뒤프레와의 이별 스토리를 많이 달고 있기에 애증을 갖고 볼 수밖에 없었다. 앵콜을 받으며 무대 입장을 천천히 하다가 갑자기 뒤돌아서며 한 손을 크게 흔들었다.

그러고는 신년 음악회에서 반드시 연주하게 되는 <라테츠키 행진곡>이 마치 굉음(?) 같은 팡파르로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때 순간적으로 가졌던 궁금증이 있었다. 과연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은 지휘자의 지휘봉을 보며 연주할까?

라테츠키 행진곡 듣기 ☞

지휘자의 지휘봉 없는 연주

사람의 시야는 180~210도까지 볼 수 있다고 하지만, 단원들은 거의 악보만을 보고 연주를 한다. 폰 카라얀은 아예 눈을 감고 혼자 지휘를 하는 것 같고, 번스타인은 연주에 맞춰 무용하듯이 지휘를 하는 것 같다. 지휘와 연주가 따로인 듯한 광경이다.

그럼 지휘자의 지휘봉은 언제 필요한가. 지휘봉이 진정으로 필요할 때는 연습할 때라고 한다. 지휘자의 연주 철학은 연습 때 이미 연주에 지휘를 녹여 놓는 것이다.

지휘봉이 날아가는 순간

지휘에 몰입하다 보면 지휘봉이 날아가 버리는 경우도 있다. 지휘봉의 끝이 보면대에 부딪쳐 날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연습 때 지휘봉을 보며 충분히 익혔기에 연주는 중단되지 않는다. 이때 지휘자가 해야 할 일은 태연히 지휘봉을 주우러 가는 것이다.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멈춘다면

지휘자가 당황하는 순간은 연주자가 연주를 멈춰버렸을 때이다. 어느 피아노 협주회에서 생긴 일화이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의 연주가 이틀간 열렸다. 첫날은 무사히 협연을 마쳤는데, 다음날 협연에서 갑자기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멈추어 버렸다고 한다.

이유는, 어제 피아노와 다르다는 것이었다. 피아노 메이커는 전날 연주한 것과 같았지만 터치감이 다른 피아노로 바뀌었던 것이다. 이때는 지휘자의 노련미가 필요하다. 당황~하지 않고 관객에게 상황을 직접 설명하며 연주를 마치게 하는 분위기로 이끌어야 한다.

대신 지휘자가 만든 분위기에 어쩔 수 없이 연주를 마쳐야 하는 피아니스트의 속마음은 무척이나 괴로울 것이다.

일본 산토리홀
일본 산토리홀

지휘자에 관한 에피소드

내가 경험한 에피소드이다. 일본의 산토리홀은 폰 카라얀이 음향자문을 해서 유명해졌다. 산토리홀 무대 뒤쪽에는 1/5 정도의 관객석이 있다. 평소 지휘자의 정면 모습이 궁금했던 나는 무대 뒷좌석으로 예약을 했다.

어느 날 뜻밖의 모습을 보았다. 박수를 치지 않은 악장과 악장 사이의 잠깐 시간에 지휘자가 손수건을 꺼내는 것이 보였다. 땀을 닦으려나 싶었는데 아뿔사, 그대로 코를 푸는 게 아닌가.

지휘자와 비행기

현대 지휘자에게는 비행기가 친구이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마티네(낮의 연주회)를 지휘한 밤에 비행기를 타고, 다음날 유럽에서의 지휘할 때도 있다. 따라서 비행기가 결항되면 무척 곤혹스러워한다. 2010년 4월의 아이슬란드 화산의 분화로 유럽의 항공로가 멈추었을 때, 많은 지휘자들이 곤욕을 치렀다.

마에스트로의 철학과 보람

작곡가의 음악작품은 지휘자의 지휘를 통해 재해석된다. 지휘자는 자신의 음악적 비전을 연주로 표현한다. 여기에다 오케스트라 단원의 리더로서 팀워크를 발휘해야 한다. 청중에게 공감과 위로, 영감을 전하며 듣는 이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지휘자의 보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