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의 계절 – 데이지의 대사에 감춰진 삶의 권태


위대한 개츠비의 계절

소설 위대한 개츠비

12월의 시작이다. 크리스마스와 송년 모임이 많아지는 개츠비의 계절이다. 팬데믹과 엔데믹을 거치면서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종종 모임 관련 문자가 온다. 오늘 지인의 문자를 읽는데 데이지의 대사가 떠올랐다.

“오후에는 뭘 할까요?
그리고 내일은, 또 삼십 년 동안은?”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서 여주인공 데이지의 대사이다. 물질만능에 사로잡힌 현대인의 하루하루는 삶의 권태로 가득하다. 매일 밤 파티가 열리는 데이지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데이지의 대사

동안거의 시작과 혼술의 감성

나는 작은 술자리를 즐기는 편이다. 자정 무렵의 혼술 분위기는 나의 감성을 최대로 자극한다. 요즘 단어로는 ‘갬성’이 충만해지는 시간이다.

파티장은 나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다. 반드시 참가해야 하는 모임 외에는 기피하는 편이다. 사양을 할 때에는 동안거(冬安居)라는 핑계를 댄다. 나의 동안거라 함은 내 스스로가 정한 일시적 은둔이다. 열광하는 프로야구 페넌트레이스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동안거가 시작된다. 즉, 스토브리브 리그와 함께 혼자 즐기는 즐거움으로 겨울을 보내는 것이다.

하현 작가의 산문집 <어느 맑은 날 약속이 취소되는 기쁨에 대하여>처럼, 내면의 평온을 찾아 잔잔하게 살아가는 생활이다. 이런 변화는 결국 나이 들었다는 증거라며 다소 쓸쓸한 팩폭을 보내온 지인도 있다.

사피오 섹슈얼의 매력

그렇다고 만남의 융통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옛 직장 선배를 만난다. 일 년에 4~5번 정도의 만남이다. 선배와의 술자리는 언제나 기대되고 우리의 이야기는 지루하지 않다.

남자의 술자리 대화는 대체적으로 정치, 경제, 여자 이야기로 뫼비우스 띠처럼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선배와의 이야기는 언제나 새로운 지식정보로 사피오 섹슈얼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소주를 좋아하지 않는다. 20도 전후의 소주 알코올기가 나의 입맛에 맞지 않아 주로 맥주를 즐긴다. 소주에 무관심하던 어느 날, 선배는 소주 브랜드명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풀었다. 진로(眞路)를 ‘참이슬’로 풀어낸 광고업계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나를 매혹했다.

한자 ‘진로’가 우리말 ‘참이슬’로 풀이되는 당연함이 브랜드명으로 탄생되는 신박함. 어쩌면 콜럼버스의 계란, 아니 피렌체 두오모 성당의 돔을 설계한 브루넬레스키의 계란일지도 모르겠다.

풀잎 이슬(草露)의 덧없음

참이슬 소주를 생각하니 문득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마트에 가면 마시지도 않는 소주 코너에 눈길이 간다. 그중에 ‘참이슬’ 소주병을 유심히 보게 된다. 이슬이라는 맑은 분위기가 선한 이미지로 내면화되지만, 한편으로는 소주처럼 쓰디쓴 인생의 덧없음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있어서이다. 연산군이다. 그는 조선왕조의 폭군이면서도 아이러니컬하게 시인이라 불리기도 한다.

인생은 초로(草露)와 같아서
만날 일이 많지 않더이다.

혁명 한 방에 이슬처럼 무너진 연산군이 풀잎 이슬을 보고 열흘 전에 지었던 시(詩)라고 전해진다. 반정을 예감하고 권좌의 미련과 이승의 애착을 내려놓으며 지었던 시였을까? 중종반정에 내몰린 다음날, 폐위된 연산군의 심정은 이 시를 회상하고 있었을 것만 같다.

연산군의 인생 덧없음이나 데이지의 삶의 권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 또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덧없음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권태를 느끼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와 그들의 삶의 가치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피츠제럴드는 소설의 마무리에서 데이지의 마지막 심정을 생략했다. 개츠비를 죽음으로 몰고 간 금수저 데이지의 심정과 삶의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개츠비나 피츠 제럴드는 맑은 영혼의 소유자는 아니었듯 싶다. 하지만 그들은 위대하다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소설 제목의 영향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차라리 소설 속 캐러웨이 닉의 모습이 더욱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중용의 덕을 지니고 사색하는 그의 이미지가 나에게 큰 감동이었다.

12월과 연말에 느끼기 쉬운 파티 후의 허전함이 많아지는 시기이다. 역사와 소설을 통해 이러한 감정을 극복하기 위한 자기최면이 필요하다. 이럴 때 나는 의연했던 캐러웨이 닉의 마음을 가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