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아나운서의 페르소나


여성 아나운서의 페르소나

여성 아나운서의 페르소나는 일반인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그들은 방송에서 정확한 발음과 세련된 말투로 이지적인 매력만을 보여준다. 요즘 유튜브 예능 프로에 프리랜서 아나운서의 진출이 많아졌다. 공중파와는 다른 모습으로 예능 감각을 선보이는 것을 즐겁게 보고 있다.

유튜브에서 드러난 여성 아나운서의 정체성을 생각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꿈

어린 시절 여러 꿈 중에는 방송국 엔지니어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딩이 되어 이과생이 되었고 공대 전자과를 지망했다. 나중에 전산과로 편입하여 IT 프로그래머가 되면서 방송국 엔지니어의 꿈은 버렸다.

뉴스센터 스튜디오의 긴장감

지방의 KBS 방송국에서 실습을 한 적이 있다. 전자과 학생 신분으로 방송 엔지니어 부문의 실습이었다. 방송 장비실을 향하는 복도 중간에는 뉴스센터 스튜디오가 있었다. 이중 방음 유리벽 사이로 보이는 데스크의 마이크에는 독특한 긴장감이 서려있는 듯했다.

단정하고 절제된 아나운서의 멋진 아우라였다. 실습기간 내내 뉴스센터 스튜디오를 지날 때는 나 홀로 상상의 긴장을 즐기기도 했다. 긴장과 모험을 즐기는 나의 취향도 한몫했으리라.

아나운서의 스트레스와 공적 생활

아나운서라는 직업은 사회적 지위와 품격을 만인에게 인정받는 공인의 직군이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을 파헤쳐보면 3D업종까지는 아닐지라도 극도의 스트레스를 안고 사는 직군임에 틀림없다. 실수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과 시간 절대 엄수라는 살얼음을 걷는 긴장의 생활이다.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불특정 다수의 시선 또한 그들의 자유를 옥죌 것이다. 언젠가 KBS 아침마당에 나온 연사가 두 사회자를 향해 말을 건넸다.

매일 새벽 출근하느라 간밤에 친구들과 마음껏 술 한잔 못 하는 생활이 참 딱하십니다.

순간 카메라는 두 MC에게 초점이 맞춰졌다. 클로즈업된 얼굴에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론 분명 씁쓰레했을 것이다.

여성 아나운서의 긍정 이미지

한때 차도녀 같은 여성 아나운서가 좋았다. 지적인 이미지와 침착한 말투가 신비로웠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례하지 않는 그들의 태도가 부러웠다. 방송에서 보이는 모습이 전부는 아닐 거라 추측하면서도 방송 이면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평소 행동이 궁금했다.

그랬기에 그들의 신간이 나오면 무조건 구입하는 습관도 있었다. 공적 공간이 아닌 사적 공간에서 그들의 일탈 이야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여성 아나운서의 예능

요즘 유튜브에 프리랜서 아나운서들의 예능 프로가 많아졌다. 그들의 대화를 듣노라면 레거시 미디어에서 느꼈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기계적인 대화보다는 일상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동안 공중파에서 억제되었던 긴장이 풀려서인지 유튜브에서는 수다에 가까운 대화가 이어진다.

한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던 그들이었기에 흐트러진 말투와 B급 대화가 아직은 낯설다.

오늘도 남자 친구와 장시간 키스를 했다는 여성 아나운서와 일본의 애로 배우의 활동을 이야기하는 남자 아나운서의 대화가 방송되었다. 유튜브라는 다소 방임적인 방송 환경이기에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지만 당혹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비록 공중파는 아니었다고는 해도 내가 갖고 있는 아나운서의 선입견을 깨는 유튜브 방송이기도 했고.

하지만 그들의 수다가 불쾌하거나 싫지는 않다. 그동안 공중파 TV에서 보아온 남녀 아나운서를 통틀어 파격이었다고 생각하는 대화를 떠올렸다. 한때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7번 3악장 시그널로 방영하는 <TV, 책을 보다>라는 프로가 있었다. 여성 아나운서가 MC였는 데, 정유정의 소설 <28>을 진행할 때였다.

MC는 정유정의 소설에는 사랑의 행위가 없다는 질문을 한다. 이에 정유정 작가는 “키스신 있어요”라고 대답을 하자 MC는 곧장 되받아 친다.

그 정도로는 약해요!

그동안 농담과 장난기 없는 여성 아나운서를 보아왔던 이미지였기에 교과서적인 대화만 할 줄 알았던 MC였다. 그래서였을까, ‘그 정도로는 약해요!’ 라는 표현은 파격이라고까지 생각했었다.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공중파 아나운서의 한계

기억에 남았던 이야기도 있다. KBS 정용실 아나운서가 세 명의 여성 방송작가들과 나눈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 <언젠가 사랑이 말을 걸면>이라는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는데, 결혼하여 아기 낳고 가정에 묻히면서 ‘평생 나에게 또다시 사랑이 찾아올까?’라는 대화였다.

은근히 매디슨 카운티 다리와 같은 일탈의 이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사랑이란 이런 것이더라’는 평범한 내러티브에 지나지 않았다. 약간의 아쉬움을 가지기는 했지만 책에서는 마음에 드는 문장은 있었다. 마음에 드는 문장이라 가끔씩 인용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사랑이란,
사소한 취향이 서로 잘 맞으면 그만큼 행복한 것도 없다.
부부나 가족뿐 만이 아니라 친구 사이에서도
소소한 것을 공유하는 기쁨이 무엇보다 크다.

공감하는 바이다. 하지만 연인이 아닌 남녀 사이에서는 공유하는 소소한 기쁨이 도덕과 현실로 충돌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공중파와 유튜브에서의 대답은 아무래도 달라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