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완송의 고독과 투혼


 

스완송의 고독과 투혼

나는 버스킹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젊은 버스커들이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박수까지 보낸 다음 팁까지 후하게 주는 편이다. 버스킹을 하는 용기와 재능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에 말이다.

버스커의 용기와 음악

언젠가 우에노 공원을 산책하다가 어느 첼리스트의 버스킹을 보았다. 연주 실력은 내가 느끼기에는 아마추어 이상의 실력이었다. 버스킹이 끝날 때까지 앉아 감상을 하였던지라 그 첼리스트는 줄곧 나에게 시선을 보내왔다.

앵콜 신청곡을 말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혹시나 익숙한 연주곡이 아니라 당황해할 것 같아 박수와 미소로만 성원을 보냈다. 버스킹이 끝나고 동전이 아닌 지폐를 건네니 환하고 밝은 모습으로 눈인사 답례를 보내주었다.

신청하고 싶었던 첼로곡은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에 나오는 <백조> 였다. 그때 이 곡을 감상하고 싶었던 것은 ‘스완송’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버스커
우에노 공원의 버스킹

이득렬 앵커와 스완송

우리나라 초창기 뉴스 앵커의 대명사였던 MBC의 이득렬 앵커가 생각난다. MBC 사장직을 역임하고 은퇴 후, 계약직으로 재차 방송 진행을 맡았을 때의 기억이다. 그 프로가 자신의 스완송이 될 거라는 인터뷰를 TV에서 직접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스완송을 제대로 부를 틈도 없이 그는 뇌출혈로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럴 때 말이 씨가 되었다고 하나?

백조와 작은 새의 마지막

백조가 임종할 때 마지막 노래를 부른다고 하는데 이를 스완송이라고 한다. 예술가의 마지막 작품이나 최후의 공연을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스완송은 평소에는 울지 않던 백조가 죽음 직전에야 단 한 번 노래를 부른다는 속설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마치 영국의 가수 마리안 페이스풀이 불렀던 <This little bird> 와 비슷한 분위기이다.

마리안 페이스풀의 This little bird

This little bird 노래가사를 보면 다소 슬픈 서정을 가진 노래이다. 작은 새가 땅에 내려앉는 순간을 상기시키며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작은 새가 단 한번 땅 위에 닿을 때가 있다. 그때가 언제인가? 그 작은 새가 죽었을 때’ 라며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백조는 왜 평소에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마지막에서야 노래를 하고, 작은 새는 왜 생을 다한 마지막에서야 땅 위에 오는 걸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백조의 스완송과 작은 새의 행동은 우리의 삶에서도 마주하는 현상일 수 있다.

나만의 스완송을 찾아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은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게 또 마음대로 잘 안 되는 게 우리의 세상살이이다. 삶의 에너지가 소진되고, 나의 노래가 세상에 충분히 전달되지 못할 때가 올 것이다.

나 홀로 스완송을 부르기 위해 ‘마지막’ 이라는 불꽃의 투혼에 기대를 걸고 와신상담 분투하는 인간의 고독이 때로는 서러울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이 언제나 끊임없는 창조와 소통의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말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언젠가 부를 나의 스완송은 내 스스로가 아름다웠다고 자평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