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과 수필의 닮은 점
[실전] 수필 쓰기 핵심
꾸미지 않는 원재료
수석과 수필은 닮은 점이 많다. 닮은 구석이 한둘이 아니다. 이 둘은 첫째, 꾸미고 가공하지 않는 원재료를 취한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둘째로는 그 소재가 전적으로 취하려는 사람의 혜안에 의해서 선택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아는 만큼 보이고 느낀다는 미적 감상안이 작동함은 물론이다.
세 번째로 더 보태면 이것은 둘 다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똑같은 것이 많고, 그런 의심을 받는다면 그것은 존재 이유를 잃고 말 것이다. 바로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가공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누가 그런 가짜를 눈여겨볼 것인가. 그런 돌은 애초에 수석으로 취할 수도 없으며 그렇게 쓰인 수필 또한 좋은 수필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듯 수석과 수필은 공통점이 많다.
수필 소재 선택의 중요성
그중에서도 나는 수필의 경우 소재의 중요성을 들고 싶다. 수석이 적어도 색상과 강도 면에서 일정한 규격에 맞아야 하듯이, 수필도 글을 쓰는 사람의 도덕성과 자질과 열정이 빚어낸 결과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석을 통한 상상력
수석을 취미로 가지면 우선 좋은 점이, 상상을 많이 할 수 있고 그런 상상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느낌과 영감은 글을 쓰는 데도 많은 영향을 준다. 어떤 시원을 더듬어 보게도 하고 존재의 의미를 찾게 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려보는 상상력을 키워주기도 하는 것이다. 집에서 내가 가까이 두고 감상하는 수석은 두 점이다. 둘 다 남한강 돌로서 재질로는 일급에 속한다. 그중에 ‘노모의 비손’이라고 명명한 돌은 수마 상태가 최상급이다. 거기다가 이름 붙여진 대로 누구를 기다리는 그윽한 눈빛이 일품이다.
그런 형상의 돌을 두고 나는 마음속으로 자일을 걸고 등반을 즐긴다. 뒷벽은 인수봉의 암벽처럼 아슬아슬하게 느껴져, 될수록 피하고 얼굴 앞면 형상 쪽 골이 파인 곳으로 다리를 걸치고서 오른다. 그러면 긴장감은 고조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이 피어난다. 내려다보면 그야말로 천 길 낭떠러지고 올려다보면 아찔한 하늘이 있을 뿐이다. 그 천길 단애에서 손과 발에 힘을 주며 오르면서 사람 살기의 어려움과 줄타기 같은 생을 되새겨 보기도 한다.
이런 때는 누군가 말한 ‘인생은 외줄을 타는 것과 같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저편으로 떨어지면 파멸이고 이곳으로 떨어지면 성공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음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또 다른 수석 하나는 숨은그림찾기의 묘미를 안겨준다.
대표적인 형상을 들어 ‘아담과 이브’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숨어있는 그림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먼저 명명된 그림은 온전히 나체인 두 남녀가 껴안고서 속삭이는 모습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갈 정도로 은밀하다. 한데 이 돌은 또한 각도를 달리하면 전혀 다른 형상이 된다. 한쪽의 굴곡은 여인의 모습으로 보면 트레머리가 되고, 불상으로 보면 나발 형태가 된다. 이런 모습은 여인의 형상으로도 아름답지만, 부처님의 존안으로 보아도 온화하기 짝이 없다.
수필의 의미와 수석의 공통점
그뿐만 아니라 누운 형상으로 보면 큰바위 얼굴로 보이고, 아래쪽에서 쳐다보면 한껏 머리 장식으로 멋을 낸 또 다른 여인상으로 드러난다. 수석의 묘미를 한껏 보여주는 돌이다. 모든 것은 틀에 맞추고 규격화시키면 상상은 스러진다. 그래서 무엇을 꼭 닮은 것보다는 비슷한 것이 훨씬 상상의 나래를 더 펴게 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돌 중의 하나는 머릿속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펼쳐주고 다른 하나는 사물을 관찰하는 시야를 훈련한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런 걸 느끼는 가운데 한편으로는 또 다른 여백의 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한국화에서 여백 처리는 중요한데 그러한 여유와 상상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석을 보면서 때때로 수필의 의미, 지향점, 상상의 문제를 함께 떠올리는 것은 두 대상은 다르지만 추구하는 바가 같기 때문이 아닐까.
민얼굴의 아름다움
필자가 소장한 수석들 가운데, 특별히 바위형 수석을 아끼는 이유가 있다. 이 돌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여러 생각이 떠오른다. 왜냐하면,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서 가공하지 않는 돌인 까닭이다.
하지만 이 돌은 조금은 난해하다. 피카소의 그림처럼 물상이 바로 한눈에 들어오지 않고 볼록렌즈를 통해 볼 때처럼 이중 삼중 형상으로 변한다. 그래서 입석으로 보기도 하고 뉘어서 갯바위형으로 보기도 한다. 역시 수석은 조석(造石)이 아닌 것이, 흥취도 주고 싫증도 나지 않는다. 꾸미지 않는 민얼굴이 더 아름다움을 안긴다는 뜻이다.
꾸민 글의 결말
꾸며서 쓴 글은, 얼핏 화려하고 짜임새가 있어 보일지 몰라도 금방 흠이 보이게 마련이며 시들해진다. 수석을 보면서 ‘꾸민 글’의 문제를 되짚어 본 것이다.
* 해당 내용은 임병식 저자의 [수필 쓰기 핵심]에서 해드림출판사의 허락하에 인용과 참조를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