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머무는 소쇄원을 거닐며
소쇄원으로 드라이브
녹차 한 잔을 가득 마시고 또 한 잔을 비웠다. 그래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다. 정체된 일상의 일로 마음이 무겁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가끔 하던 일을 멈추고 *소쇄원(瀟灑園)을 향해 홀로 드라이브를 떠난다. 시내를 벗어나 산길에 접어들었다.
달리는 길섶을 따라 들꽃이 하늘거린다. 얼굴은 훈풍에 젖고 가슴은 뜬구름 속으로 한없이 젖어만 간다. 우거진 녹음을 바라보는 시선 사이로 경직된 마음이 풀리기 시작한다.
소쇄원의 고요
이윽고 광주(光州)의 무등산(無等山) 기슭에 위치한 소쇄원 정원에 다다랐다. 정원의 입구는 대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다. 오솔길을 에워싼 대나무 숲에선 하늘을 볼 수 없을 정도다. 여름 한낮의 댓잎에 서늘한 바람이 일고 있다. 발길을 멈춰 대나무 숲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사시사철 변함없는 모습과 꿋꿋한 대나무의 자태는 언제 보아도 마음 든든하다. 거기에다 휠 줄도 아는 유연함까지 갖추었으니 융통성이 부족한 나로서는 여간 부러운 게 아니다.
대나무 숲을 낀 오솔길을 벗어나니 “봉황을 기다린다”라는 대봉대(待鳳臺)가 나타난다. 햇살이 살며시 스며드는 초가지붕의 정자이다. 신발을 벗고서 잠시 마루에 오른다. 좌정하여 봉황을 기다리듯이 마음을 가다듬어 조망할 여유를 가져본다.
늦은 오후의 고즈넉함 속으로 소쇄원이 들어가 앉아있는 느낌이다. 먼 밖에서 바라보는 정자의 모습도 아름답지만 정자 안에서 바라보는 밖의 경치도 아름답다. 그래서 정자란 쌍방향의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곳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내면의 멋과 외면의 멋이 일치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런 정자의 모습이 나에게도 흠모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소쇄원과 우암 송시열의 자취
외나무다리를 건너 매화를 심어 가꾼 매대(梅臺)라는 담벽에는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慮)라고 새겨진 일종의 문패가 보인다. “맑고 깨끗한 생활을 하는 선비의 오두막집”이라는 뜻으로 우암 송시열의 글씨라고 한다.
사람은 가고 없어도 수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우암의 흔적을 볼 수 있다는 게 여간 신기하지 않다. 나 자신이 만약 후세에 자취를 남기게 된다면 어떤 모습의 자취를 남길 수 있을까. 내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게 한다.
제월당의 낭만과 평화
고샅을 지나 사랑채와 서재를 겸했던 제월당(霽月堂)으로 발길을 옮긴다. 소쇄원에서 가장 높고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고 있다. 넓지 않은 뜨락엔 이름 모를 꽃들이 아기자기하게 피어있다. 매미의 울음 속에 하얀 나비와 잠자리가 한가로이 노닐고 있다. 참으로 평화로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두 눈을 지그시 감으니 선비들의 글 읽는 목소리가 창창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제월당에 보름달이 두둥실 떠오르고, 잠 못 이루는 밤이 되면 낙향한 선비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권세를 초월하여 평범한 자연에 어울리고자 했던 여유있는 삶들이 코끝 찡하도록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달빛에 젖어 아름다움에 취했던 나의 어렸을 적 낭만이 지금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을까.
광풍각과 계곡의 조화
갖은 상념 속에서 나의 발길은 빛과 바람이 머무는 광풍각(光風閣)에 머물고 있다. 정원의 중앙에 자리한 광풍각 앞으로 작은 계곡이 흐르고 있다. 우리 조상은 사람이 자연 속에 깃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정원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소쇄원은 자연 그대로를 살리면서 꼭 필요한 부분에만 적절하게 인공을 가하였다. 암반에 인공을 가미하여 만든 조그마한 폭포에서는 자연의 소리와 바람을 일으키며 시원스럽게 한껏 쏟아져 내린다.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룬 폭포 소리를 들으며 진부한 내 생활에서 융통성과 운용의 묘(妙)를 헤아려본다.
소쇄원도의 풍류와 여유
흐르는 계곡물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으려니 탁족(濯足) 생각이 간절하다. 두 발을 담그니 광풍각에서 보았던 소쇄원도(瀟灑園圖)의 풍경이 떠오른다. 자연을 벗 삼아 바위 한 편에서는 바둑을 두고 다른 한 편에서는 가야금을 타는 선비들의 여유 있는 풍류가 새삼 그리워진다.
세월마저도 머무를 것만 같은 욕심 없고 유유자적한 삶의 체취들. 먼 훗날 나도 느껴보고 싶은 모습들이다.
이런 바람이 지금 나의 현실 속에서 부질없는 공상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공상 속에서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나에게도 언젠가는 이런 삶의 여유가 찾아오리라는 희망 속에 삶의 의미를 되뇌이어 보며 오늘 하루를 살아간다.
인적이 드물어진 소쇄원에 이내 땅거미가 지고 다시금 고요가 찾아든다. 또 하루가 세월에 묻히어간다.
*소쇄원(瀟灑園)~조선 중기의 거주 주택이 아닌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별서란 살림집에서 떨어져 산수 좋은 공간에 마련된 주거공간이요, 정자와 더불어 조성된 정원을 별서정원이라 했다는데 요즘 말로 하자면 산림 속의 별장이라고 할 것이다.
이 정원의 주인인 양산보(梁山甫)는 17세에 과거에 급제했으나 그의 스승인 조광조가 사화에 연루되어 전라도 능주에 유배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하향하여 향리인 지석마을에 은거처를 마련한 뒤, 계곡을 중심으로 조영한 원림(園林)이다.
소쇄원의 ‘소쇄’는 본래 공덕장(孔德璋)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말로서 깨끗하고 시원함을 의미한다. 양산보는 이러한 명칭을 붙인 정원의 주인이라는 뜻에서 자신의 호를 소쇄옹(瀟灑翁)이라 하였다. (참고자료: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外)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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