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고독 사색의 여유
월요일 같은 화요일이다. 2023년의 마지막 주이기도 하다. 최민석의 소설 <쿨한 여자>가 떠오른다. 소설 내용 중에 ‘작가는 제주도 같은 소설을 써야 해’라는 문구가 나온다.
삶에 지칠 때, 제주도의 푸른 바다처럼 마음을 편안하게 펼칠 수 있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최근 제주의 물가를 생각하면 두 팔을 벌려 다가와도 돌아서고 싶지만 말이다.
마이너리티의 순리
요즘은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정체를 풀고 싶은 마음에 제주행 비행기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마음의 사치다. 사람은 눈치가 있어야 하기에 그럴 수도 없다. 정중동의 분위기로 주변을 따르는 것이 마이너리티의 순리다.
일탈의 기분을 자제해야만 하는 현실이 마음을 짓눌리지만 크게 불만은 없다. 사람은 항시 행복할 수는 없기에 잠시 바이오리듬이 바닥을 치고 있다는 현실로 위로하면 그만이다.
언젠가부터는 연말 연휴와 무언가의 송년축제는 동안거라는 의식으로 애써 외면한다. 스스로를 위리안치하며 고요함을 즐긴다. 신조어가 된 혼놀 혼술의 즐거움이다. 문득 두 인문학자를 생각한다. 페트라르카와 에라스무스다.
페트라르카의 글쓰기와 고요함
生은 유한하고 세월은 결코 기다려 주지 않는다고 삶의 고독을 토로했던 르네상스 인문학의 선구자 페트라르카. 그는 세월의 고독을 글을 통해 삶의 고요함을 찾았다. 그를 생각하면 미니멀리즘과 고요함을 핑계로 게으르게 살고 있지 않나 자문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게으름 속에서도 세월의 조급함이 느껴지고 알 수 없는 고독에 빠지는 순간이 잦아진다. 사회가 경직되니 비즈니스까지 경직된 느낌을 받아서다. 무기력 또한 표출된다. 이제는 공격형 미드필드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바꾸어 生의 중원에서 여유를 부릴 때도 되었는데 말이다.
에라스무스의 중립적 사색
믿음도 지나치면 도그마가 되고 광기가 됨을 잘 알고 있었던 에라스무스. 그는 정념의 인간이라기보다는 사색의 인간이었다고 한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는 중립적 辯에 대해 애매주의자라고 비난을 받기도 했던 에라스무스.
하지만 그에게도 사색의 여유가 마음의 정체로 빠지는 슬럼프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정념이 사색의 여유를 지배했을 때도 의연했을까?
사람은 언제나 처한 상황에서 완벽한 해결책을 찾기 어렵다. 때로는 여유를 가지고 지혜 있는 리더나 전문가의 지시를 따르는 것도 현명한 선택일 수 있다. 에라스무스처럼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적절한 때에 행동하는 것도 지혜로운 대처의 한 방법이고, 강물이 흐르듯이 사는 것도 요즘의 위안이다.
거창하게는 노자사상의 상선약수(上善若水) 철학의 위안이기도 하고.
마치며
마음의 정체는 지리멸렬의 상태에 빠지기 쉽다. 헤밍웨이는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서둘러 가질 필요는 없겠다. 분위기 해소를 위해 여행으로의 일탈도 방법이겠지만, 나는 이번 연말 방콕여행을 하려 한다. 48시간,72시간 집돌이 체험을 하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독서와 유튜브 그리고 글쓰기는 정중동의 친구들이다. 멋진 나의 친구들이 아닐 수 없다. 머릿속의 이야기를 마음껏 펼치고 2024년의 새로운 여정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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