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비 c’est la vie


세라비 c’est la vie

명화극장의 매력

흑백TV 시절에 토요일만 되면 기다려지는 게 주말의 명화극장이었다. 이국적인 마스크를 한 배우들의 신비감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영화배경이 흥분을 더했는데, 배우들의 음성 또한 매력적이었다. 분명 한국성우들의 더빙인데도 마치 목소리는 실제 외국인의 발성처럼 들렸으니 완벽한 명화극장이 된 것이다.

토요일이 가까워져 오면 주말명화 예고편을 방영하였는데, 예고편을 기다리는 설레임 또한 즐거움이었다 . 당시 검은 안경테 모습의 정영일 영화평론가가 넥타이 정장 차림이 아닌 양복 속의 폴라차림으로 주말의 명화를 소개를 하였는 데, 그 많은 영화를 다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한 무한한 부러움이 있었다.

얼마후 일본으로 직장으로 옮겨 TV를 보니 일본에도 주말의 명화가 있었고, 요도카와 나가하루라는 영화평론가가 해설을 하고 있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정영일 평론가는 절대 웃지 않고 흐트러짐 없는 부동의 자세로 예고편 해설을 하였지만, 요도카와는 중간중간 장난기 서린듯한 웃음을 지으며 손짓까지 곁들여 해설을 하였다.

해설 마지막엔 반드시 ‘사요나라, 사요나라, 사요나라(안녕히)’라는 특유의 엔딩으로 인사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영화감독인 구로자와와 더불어 일본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평판이 있는 영화해설자였다.

요도카와 나가하루의 가문의 복수

요도카와 나가하루(淀川長治 1909―1998)는 “보다 많은 사람에게 영화의 매력을 전한다”는 일념으로 타계하기 전날까지도 쉬임 없이 32년간이나 해설을 계속 했었다.

1998년 9월, 오랜 세월 친교가 있던 쿠로자와 감독이 타계하자, 스스로의 죽음을 예감했었는지, 관속에 잠들어 있는 쿠로자와에게 “난 울지 않아, 나도 곧 뒤따라가기 때문이야”라고 말을 걸었고, 그로부터 2개월 후인 브루스 윌리스의 “라스트 맨 스탠딩”의 해설수록을 끝낸 후에 졸도하듯 쓰러져 다음 날 향년 89세로 타계하였다.

요도카와 나가하루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 생을 마쳤다. 자신의 모든 생을 영화에 마친 셈이지만 그에게는 결혼하지 않은 이유를 타계 후 TV를 통해서 알게 되었는 데, 그 이유가 기이한 자신의 집안에 대한 복수였다는 슬픈 이야기였다 .

요도카와 나가하루의 부친은 나이 어린 신부를 맞이했다고 한다. 내 기억으로는 10살이 훌쩍 넘는 차이였던 것 같은 데,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獨子였던 요도카와 나가하루였다. 그의 부친은 어린신부를 아내로 대하기 보다는 남존여비의 보수적 성격이었다.

부친은 어머니를 평생 남편의 수족으로만 여기며 엄한 통제를 하였는데, 어린 요도카와에게 비친 모친의 생애가 너무 불쌍해 보였던 모양이었다. 부친에 대한 불만과 반항이 결국 부친에 대한 저주로 이어지고 복수를 꿈꾸게 되는 데, 그 복수극의 내용은 독자인 자신이 결혼을 하지 않고 가문의 대를 끊는 것이었다. 결국은 자신의 뜻대로 독신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참으로 혹독하고 냉엄한 가문의 복수가 아닐 수 없다.

사할린 동포의 슬픈 이야기

얼마 전 TV 에서 영구 귀국한 사할린동포가 모여 사는 고향마을 이야기를 방영하였다. 그 프로를 보면서 20여 년 전 일본의 NHK에서 방영했던 사할린 동포의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할린동포의 재회를 다큐멘터리로 편집한 ‘너무 늦은 재회(遅すぎる再会)’라는 프로를 보던 그 날 밤, 나는 너무 마음이 아파 다섯 평의 다다미방에서 취할 정도로 맥주를 마셨다.

다큐멘터리 내용은, 한국에서 신혼생활 중에 징용으로 끌려온 한국남자와 한국에 남은 신부가 노부부가 되어 재회하는 이야기였다. 그 남자는 일본의 항복으로 종전은 되었지만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사할린에서 독신으로 살게 된다. 징용으로 생이별을 한 그 남자의 아내 또한 징용 간 남편을 기다리며 슬하의 자식 없이 50여 년의 세월을 기다려왔다.

한국과 일본정부의 사할린동포 영구귀국 추진에 따라 이들 부부는 50여 년이 흘러 노부부가 되어서야 재회를 한다. 하지만 50여 년의 세월은 부부로서의 애정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취재진의 권유로 두 손을 잡고 공항을 걸어나오지만 노부부의 표정은 눈물 한 번 글썽일 수 없는 그저 어색한 남남의 만남 같은 것이었다.

재회 당사자들의 감정에 아랑곳없이 TV장면을 지켜보는 내 가슴에는 까닭 모를 분노와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흐르고 취재진이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노부부의 생활상을 취재하기 위해 다시금 노부부를 찾았을 때, 그 할아버지는 한국의 환경과 습관에 적응하지 못한 불안한 생활이 지속되고 있었다.

사할린에서 공동생산 공동분배라는 사회주의의 규칙생활에 익숙해진 할아버지는 오히려 자유스러운 자본주의의 생활에 의욕을 잃고 우울증에 빠져있었고, 할머니 또한 할아버지와 함께 농사도 지으며 남은여생을 남편에게 의지한 채 살아갈 계획이었으나 우울증에 빠진 남편의 모습에서 실망감만 느낄 뿐이었다.

마치 영화 쇼생크탈출에서 모범수로 가석방되었으니 장기복역으로 익숙해진 영어(囹圄)의 생활과 사회의 생활에 적응을 못 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NHK뉴스에서 그 할아버지의 소식이 방영되었다. 결국 할아버지는 마을 앞 신작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했고, TV화면은 아직 마르지 않은 할아버지 봉분에 취재진의 조화와 소주 한 잔만이 할아버지의 흔적을 대신하고 있었다. 허무한 인생이 아닐 수 없었다.

삶의 의미

우리는 대체적으로 평범한 삶을 가꾸어 간다고는 하지만 치열하게 살고 있다. 치열하게 산다고는 하지만 불현듯 평범한 삶의 테두리에서 낙오되는 듯한 조바심에 살고도 있다. 한 마리의 소(牛)가 외(一)나무 다리를 건너가는 듯한 아슬아슬한 인간의 ‘生’.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인생인가에 대한 딜레마에 자주 빠진다.

요도가와의 가문에 대한 복수나 너무 늦은 재회에 따른 부부애의 상실을 보면서, 한 인생을 꾸려가는 데도 이토록 힘이 드는가를 생각해 보게 한다. 도대체 산다는 게 무엇이던가. 오, 세라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