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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루 해리스의 ‘Pledging My Love’
차가운 푸름, 그 이상의 깊이
“I feel blue.” 단순한 영어 문장이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의 파장은 예사롭지 않다. 예전에는 그저 ‘나는 파란색을 느낀다’ 정도로, 색깔을 감지하는 수준으로만 받아들였다. 마치 눈으로 보이는 것을 그대로 읽듯, ‘feel’이라는 단어를 시각적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 문장이 내포한 깊은 슬픔이나 우울함은 전혀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언어는 단순히 문자적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다. 맥락 속에서 울리는 감정의 공명을 포착할 때 비로소 언어는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마치 음악처럼 말이다.
블루스, 한(恨)의 서사를 담은 푸른 선율
음악평론가 임진모는 블루스 음악을 흑인들의 한(恨)이 서린 음악이라고 이야기했다. 그의 말처럼 블루스에는 설명하기 힘든 깊은 슬픔과 애환이 녹아 있다. 그렇다면 이토록 깊은 슬픔을 담은 음악에 왜 하필 ‘Blue’라는 색깔이 붙었을까? 블루스 음악의 독특한 음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블루스는 7음계 중 미(mi)와 시(si)를 반음 낮춘 음정을 사용한다. 이 반음 낮춘 음을 블루 음, 즉 블루노트라고 부른다. 이 블루음들이 모여서 블루스라는 음악 장르가 탄생한 것이다. 마치 슬픔이 모여서 깊은 슬픔의 바다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푸른 색이 슬픔의 감정과 연결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오랜 시간 동안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감정의 연결고리일까?
낭만적 푸름, 그 뒤에 숨겨진 그림자
한때 나는 사랑을 위해 왕관을 버린 윈저공의 심슨 부인이 즐겨 입었던 밝은 청색 원피스를 좋아했다. 그때의 나는 청색에서 우울함이나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피카소의 청색 시대 작품들조차 가난과 불행에서 오는 차가움으로 다가왔을 뿐, 우울함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Blue’가 우울함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 청색은 더 이상 단순한 색깔이 아니다. 청색은 다양한 감정을 담고 있는 복합적인 색이 되었다. 마치 사랑이라는 단어가 설렘과 아픔을 동시에 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쪽빛 바다, 깊고 푸른 안정
시간이 흘러 지금은 울트라마린 블루를 좋아한다. 우리나라 쪽빛과 닮은 깊고 푸른색이다. 울트라마린 블루는 정열보다는 안정감을 준다. 마치 잔잔한 파도처럼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삶의 풍파를 겪으며 맹목적인 열정보다는 안정과 조화를 추구하게 된 것일까? 울트라마린 블루는 이제 나에게 단순한 색을 넘어 삶의 여정에서 찾은 하나의 지표와 같다.
블루스의 오해, 농염함 뒤에 숨은 진실
블루스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사모님, 한 번 땡기실까요?’라는 카사노바의 느끼한 멘트 말이다. 물론 블루스가 퇴폐적인 분위기를 자아낼 때도 있지만, 그것이 블루스의 전부는 아니다. 블루스는 인간의 깊은 고뇌와 슬픔, 그리고 희망을 담아낸 음악이다. 마치 삶이라는 드라마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블루스는 단순한 농담이나 유흥거리로 치부될 수 없다. 블루스 속에는 삶의 희로애락이 녹아있으며, 그 안에서 우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공감할 수 있다.
블루스, 슬픔을 넘어선 감미로움
에밀루 해리스의 ‘Pledging My Love’를 듣는다. 블루스 특유의 감미로운 선율이 마음을 파고든다. 블루스는 단순히 슬픔을 노래하는 음악이 아니다. 슬픔을 승화시켜 아름다운 예술로 만드는 힘이 있다. 블루스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깊은 바닷속에 잠겨 있는 듯한 평온함을 느낀다.
슬픔은 우리 삶의 일부이고, 우리는 그것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한다. 블루스는 우리에게 그 방법을 알려주는 듯하다.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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