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 문학관에 흐르는 커피 향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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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파리 여행(제7화)

발자크 문학관

미라보 다리에서 발걸음을 재촉하여 발자크 문학관을 향한다. 안내 푯말이 눈에 띄지 않아 구글 앱지도에 의지한다. 지나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하는 등 물어물어 40여분 만에 어렵게 찾았다.

발자크 문학관이 있는 동네는 아르누보풍의 귀티나는 건물이 즐비했지만 그의 문학관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우리나라의 모던한 문학관에 익숙해서인지도 모른다.

살아서 가난했던 발자크는 죽어서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모양이다. 테러의 영향인지 정식 휴관일은 아니건만 여기도 오늘 문이 잠겼다.

부인 한스카의 이야기

발자크 문학관은 그가 죽기 몇 해 전, 7년간 머물며 집필을 했던 곳이다. 발자크는 살롱에서 유부녀 한스카 에벨리나 처음 만났다. 첫눈에 반한 그는 그녀가 미망인이 될 때까지 20여 년을 넘게 기다려 아내로 맞이한다.

하지만 커피 중독의 후유증인지는 몰라도 한스카 미망인을 아내로 맞이한 지 반년이 조금 지나 발자크는 심장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다.

발자크 문학관에는 한스카 부인이 사용했던 서재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은 파리 테러로 인해 임시 휴관으로 입장을 할 수가 없다. 담 너머로 발자크 문학관을 내려다본다. 내 머릿속에 기억된 계단이 보인다. 평생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발자크.

그는 이 계단으로 빚쟁이가 내려오면 뒷문으로 도망을 쳤다고 하는데, 막상 그 계단을 보니 짠한 생각이 든다. 빚쟁이 철계단 소리에 얼마나 놀랐을꼬.

발자크문학관의 철계단

 

문학과 커피의 향기

결국, 닳고 닳은 발자크의 책상과 원고도 못 보고 한스카 에벨리나 부인의 방도 못 본 체 터벅터벅 돌아 나온다. 다리의 피곤도 풀 겸 커피 생각이 간절하지만 카페가 눈에 띄지 않는다. 발자크를 생각하면 커피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카톨릭 관동대 캠퍼스 내에 있는 허니브라운이라는 커피점에 가면 발자크의 문장이 액자로 장식되어 있다고 한다.

커피가 내 몸속에 들어오면 아이디어가 뛰어오르고 위트가 꼿꼿이 일어선다.

잉크 대신 커피로 원고지를 채울 정도로 하루 40~50잔 마시며 커피에 살다 커피에 죽은 발자크다운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몽파르나스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발자크 문학관을 나와 몽파르나스로 향한다. 지하철 좌석에 앉자마자 눈이 스르르 감기는 가 싶더니 이내 졸음이 쏟아진다. 한참을 꾸벅꾸벅 졸고 가는데 귓전에 애잔한 노랫소리가 들린다. 눈을 떠보니 집시로 보이는 듯한 남자가 반주 없이 노래를 부른다.

음악으로서의 완성도는 낮지만 여행자에게는 분위기에 어울리는 노래다. 집시의 노래에 몰입한다. 나의 수필집 “마이너리그에도 커피 향은 흐른다”에 썼던 집시 이야기가 떠오른다.

고등학교 시절에 나는 김삿갓의 생애를 무척이나 동경했다. 정의감에 찬 해학과 음풍농월을 지닌 예술가적인 방랑생활이 너무도 멋져 보였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불평과 반항심이 팽배한 사춘기 시기였기에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도는 自由人의 모습이 그 무엇보다도 부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시절 나는 집시(gypsy), 보헤미안(bohemian), 배가본드(vagabond), 에뜨랑제(etranger)라는 단어를 멋있어하였고 현실을 떠난 집시적인 삶을 꿈꾸기도 하였다.

발자크 문학관에 흐르는 커피 향을 찾아서 1
발자크 문학관 (한스카 부인의 서재도 있다)

집시의 노래와 동경

흔히들 집시를 일컬어 한 곳에 安住를 못하고 독립적인 능력을 상실한 자 또는 불안정한 생활을 하는 유랑자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이야기한다. 비록 그들의 생활이 다소 현실과 의 괴리감은 있다지만 궁핍함 속에서도 현실을 헤쳐 나가는 끈기와 재능을 나는 높이 평가한다.

그랬기에 소리 따라 전국 각지를 떠도는 소리꾼이나 남사당패들처럼 그들이 지닌 예술적 재능과 열정만큼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이렇듯 나에게는 집시에 대한 예술적 동경이 있었지만 이번 파리 여행에서 집시의 동경이 일부 깨졌다.

집시는 타인에게 직접 피해를 주지 않고 규칙과 인습에 해방된 자기들만의 삶과 문화를 만드는 것으로 알았기에.

이데아적인 집시와 파리의 집시와는 현대적 개념이 다를 수는 있다. 하지만 집시 하면 소매치기로 통하는 비루한 그들의 모습을 여행 둘째 날 목격하고서 나는 실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집시의 노래는 그나마 위로가 된다. 내가 동경했던 이미지에 가까운 집시였기에 느끼는 반가움일 것이다.

노래가 끝나면 집시에게 팁을 건네려 했다. 진정으로 그의 재능을 인정해서였다. 휴대폰 녹음을 하던 중에 몽파르나스에 도착하여 서둘러 내리느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일까 영 마음이 개운치가 않다. 내 머리를 쥐어박을 수밖에. 아쉬움을 뒤로한 채 모딜리아니의 체취를 느끼기 위해 <로통도> 카페를 향한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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