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와 노숙자


무소유와 노숙자

노숙자에 대한 안타까운 한숨

서울을 떠나 광주를 향하는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방금 마신 뜨거운 커피 한 잔의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간다. 의자를 뒤로 젖히고 두 발을 쭉 펴며 기지개와 함께 허리를 길게 펴본다. 맑고 시원스런 아침햇살이 내 가슴 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느낌이다. 

독서를 하기 위해 간이 탁자를 펼친다. 그러다 문득, 책장을 향하던 나의 시선은 허공을 향하며 잠시 책을 덮는다. 조금 전 대합실에서 찢어진 경제신문을 읽고 있었던 한 노숙자의 초췌한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서였다.

이윽고 안타까운 한숨이 소리없이 흘러 나온다. 그도 어느 한가지에 능력이 있을법한데 어찌하여 자신의 희망과 능력을 버리고 노숙자가 되었을까. 언제까지 사회의 냉대와 좌절 속에서 살아야할까.

일본 노숙자의 모습

나는 한 때 일본에서 직장을 다닌 적이 있었다. 1989년 무렵의 일이다. 일본에 처음 도착하여 의아하게 느낀 것이 몇 가지 있었는 데, 그 중의 하나가 노숙자의 모습이었다. 선진국이라는 일본의 거리에 노숙자가 많다는 사실에 나는 적잖이 놀랐었다.

신문지를 깔고 노숙하는 모습들은 걸인이나 진배없는 처참한 삶이었다. 그런 거리의 노숙자와 나는 출퇴근길에 서로 인사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살갑게 지낸 적이 있었다.

일본의 주택가 한 귀퉁이에는 폐품하치장이 있었다. 한국 유학생들과 단기 체류자들 가운데는 이곳에 버려진 폐품 속에서 쓸 만한 물건을 가져다가 쓰기도 한다. 나 역시 그들 틈에 끼여 TV, 라디오, 녹음기, 책상, 의자 등의 폐품들을 주워다가 사용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일과를 마치고 어스름한 저녁 무렵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골목길 한구석에 폐품들 사이로 제법 반반해 보이는 스테레오 녹음기가 버려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건전지와 카세트테이프도 끼워져 있어 작동을 해보니 전혀 문제가 없는 녹음기였다. 나는 횡재를 했다는 느낌으로 그 녹음기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숙소로 돌아와 음악을 켜 보이며 직원들에게 자랑을 했다.

그런데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선배가 몸을 일으키더니 어서 녹음기를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 녹음기의 주인은 그 골목의 노숙자 같다는 것이었다 . 한 마디로 버려진 물건을 주워온 게 아니라 남의 물건을 훔쳐온 꼴이 된 것이다.

일본 노숙자와의 만남

당시 나의 선입견으로는 노숙자의 이미지는 걸인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걸인에게 용서를 빈다는 자체가 보통 껄끄러운 게 아니었다. 몇 시간을 망설이다가 결국은 용기를 내어 노숙자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사과를 했다. 그런데 무표정하게 내 이야기를 듣고 난 노숙자는 뜻 밖에도 ‘다이죠부요(괜찮아요)!, 다이죠부요!’를 연발하며 호탕하게 웃는 게 아닌가.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는 그 노숙자를 보는 게 부끄럽기도 해서 다른 길로 피해서 다녔는데, 어느 날 동료의 짐을 옮기려다 보니 화물차가 필요하게 되었다. 막상 화물차를 빌리려고 하니 금액이 부담되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문득 그 노숙자가 폐품 수거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조그만 리어카가 생각났다.

지난번 녹음기 때문에 계면쩍기는 했지만 비용절감을 위해 혹시나 해서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이이요!(좋아요),이이요!”하면서 선뜻 빌려주는 게 아닌가. 내가 반나절 정도 리어카를 사용해버리면, 자신은 반나절 동안 사용을 못하는 데도 말이다.

그 후로는 그 노숙자와 서로 인사를 하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고 노숙자가 살아가는 모습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비록 가정과 사회적응에 실패하여 노숙자가 되었지만, 그저 구걸하며 살아가기보다는 쓰레기장이나마 뒤져가며 수집한 폐품들을 팔아 살아가는 모습이 무척이나 긍정적으로 느껴졌다.

언젠가는 다시금 사회에 적응해서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무소유의 자유와 욕망

사람들 사이에서 물질적 욕망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유에 대한 애착과 이기심이 필요 이상의 과욕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외면적인 우월감과 체면만을 생각할 때 갖게 되는 과욕들이다. 나는 이런 과욕이 느껴질 때면 일본에서 보았던 그 노숙자를 생각하기도 한다.

녹음기를 돌려주고 리어카를 빌려 줄 때, ‘다이죠부!, 다이죠부!’라고 외쳤던 그 노숙자의 호탕한 모습에서 무소유의 자유스러움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무소유의 자유스러움을 갖는다는 건, 더욱 여유롭고 넓은 마음을 갖게 하는 것 같다. 겸허한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도 무소유의 깊은 참뜻은 결코 져버릴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