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과 정치의 미묘한 레토릭


동물농장과 정치의 미묘한 레토릭

동물농장과 정치의 미묘한 레토릭을 생각한다. 이어서 일본의 셰익스피어라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도련님>이 떠오르는 밤이다.

“이 세상은 이상한 사람 투성이다.
서로 속고 속이면서 그렇게 돌아가는 세상인가 보다.
치기꾼을 등쳐먹고 하루를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사는 것도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 나쓰메 소세키 <도련님> 에서

야누스적 욕망의 역설

나는 정치와 권력에 시니컬한 입장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을 부정하거나 저주하지는 않는다. 세상의 누군가는 대중을 이끄는 리더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 ‘권력과 명예’는 인간의 어진 마음에서 시작된 인간의 본능이라고 했다.

공자 또한 인간의 길을 이렇게 말했다. 수신을 하고, 제가를 하고 나면, 치국(治國) 하여 평천하를 이루는 것이라고.

내 방식으로 다시 해석해 보면 교양과 에티켓을 갖추고 남을 배려하다 보면 자연스레 존경하는 시선이 쌓이게 되는데, 그 시선을 부러워하게 됨으로써 권력과 명예라는 야누스적인 욕망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악은 선을 빛내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는 말이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악은 선의 결핍’이라고도 했다. 나의 편견이지만 요즘 정치인들의 이전투구의 말들이 그저 측은하게만 보인다. 말 한마디 한 마디를 하면서 그 순간의 속마음은 얼마나 살얼음 같을까.

괜한 염려인가? 구태여 욕을 얻어먹어가며 정치에 나서는 그들도 선을 위한 악의 역할일까? 아닐 것이다. 짐작은 하지만 그들의 정치철학 속내가 궁금하다.

동물농장의 정치 무대

조지 오웰의 소설 중에서 내가 유일하게 읽은 <동물농장>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

즉, 두 발의 인간은 나쁘고 네 발의 동물은 좋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두 발을 가진 새를 보고 고민을 한다. 그리고 이렇게 부연 설명을 한다.

“새의 날개는 추진하는 기관이지 조작하는 기관이 아니다.“

인간의 못된 짓의 도구는 조작을 하는 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새의 날개는 손이 아니라 발에 해당한다고 한다. 새는 두 발이 아닌 네 발이라는 대목에서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정치인들의 어설픈 레토릭이 생각났기에 말이다.

정치인의 레토릭

정치인은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레토릭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레토릭은 말과 글을 사용하여 효과적으로 타인을 설득하고 감정을 호출하는 기술이다. 하지만 정치 무대에서의 레토릭은 진정성이 없어 보인다. 대중을 현혹시키는 연설의 기술이라고까지 여겨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3가지 설득 비법

아리스토텔레스는 타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3가지를 이야기했다. 로고스(Logos),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이다. 로고스는 지식과 교양의 논리적 주장이고, 에토스는 때와 장소를 가리는 신뢰성 구축이고, 파토스는 진정성을 지닌 감정적 호소라고 할 수 있겠다.

정치인에게는 이 3가지 외에도 반박 (Antithesis)이 있다고 한다. 대립되는 주장에 대해 자신의 입장은 강화하고, 상대방의 주장은 부적절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논지이다. 물론, 정치인에게 냉소를 보내는 사람들도 정치인의 반박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왜 냉소를 보내는 것일까. 그들에게는 따뜻한 마음을 품은 파토스가 없기 때문이다. 즉, 따스한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 레토릭으로만 자신을 주장하는 데는 한계를 보여서일 것이다.

파토스를 떠올리는 소설

오늘 소설 <도련님>을 떠올렸던 것은 소설 속 ‘기요’ 라는 이름의 할머니가 생각나서였다. 서툴고 투박한 기요 할머니였지만 한 평생 오직 도련님을 향한 격려와 일편단심을 보였던 마음이 그리워서였다. 비록 소설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