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함과 예리함
예민함과 예리함. 분명히 다른 말이다. 들이대는 주관적인 잣대의 기준도 애매하다. 나의 이미지에는 예민함과 예리함이 공존한다. 예민하다는 평가는 듣기 거북해하지만 예리하다는 평가는 NCND 식으로 미소만 보일 뿐이다. 예민은 부정이요 예리는 긍정의 정서로 여기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 가끔 예민함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혹시 나만 예민한 걸까? 라고.
나쓰메 소세키
일본의 셰익스피어라는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읽으면 내 스스로의 예민함에서 어느 정도 해방되는 느낌을 갖는다.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인간의 심리까지도 헤아리는 나쓰메 소세키의 섬세한 예리함을 생각하노라면 나의 예민함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물론 소세키의 예리함과 나의 예민함을 비교한다는 자체가 무리긴 하지만 말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중에 좋아하는 소설을 말하라고 하면 망설임 없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추천한다. 제법 두꺼운 소설이지만 수필형식으로 시종일관 즐겁게 웃으면서 읽을 수 있다. 그 에스프리에 녹아 있는 메시지 또한 인간의 심리를 반성하게 만드는 강한 매력이 있다.
재미와 내용이 꽉 찬 소설이기에 100여 년이 흘러도 여전히 명작으로 전해지는 모양이다.
나쓰메 소세키 산방 기념관
몇 해 전, 도쿄에 머물 때 나쓰메 소세키의 기념관과 묘소를 차례로 찾았다. 그의 기념관인 소세키 산방은 신주쿠에 있고 묘소는 이케부쿠로에 있다. 먼저 신주쿠 근방에 있는 소세키 산방을 찾았다. 3~40분을 헤매다 겨우 찾았지만 공사 중이었다.
기존의 오두막 같던 조그만 소세키 문학관을 <소세키 산방 기념관>으로 확장하여 재개관한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생전에 소세키가 거닐었을 산방의 뜰만을 거닐다 왔다.
나쓰메 소세키의 묘소
며칠 후, 미나미 이케부쿠로의 조시가야 묘원에 영면한 소세키의 묘소를 찾았다. 그날은 비가 내린 날이었기에 추모의 분위기가 자연스레 갖추어졌다. 잘 정리된 묘원의 번호를 찾아가니 소세키의 묘소가 나타났다.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나쓰메 소세키의 영혼을 지금 만나게 되다니.
우산을 쓴 채 묵념을 올리고 소세키의 필력을 빙의받기 위한 소망을 빌었다. 한참 동안 소세키의 작품과 생애를 상상하다가 묘소 입구로 걸어 나오는 데 저 멀리 허름한 상점이 보인다. 묘소와 상점. 한 여성을 두고 친구와 3각 관계를 예리한 심리로 묘사한 <마음> 작품의 배경이 재현되는 듯했다.
그때 쏟아지는 빗속으로 택시 한 대가 상점 앞에서 멈춘다. 일본에서 실화 같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한밤 중, 택시에서 내려 상점으로 들어간 여인이 그날 제사상 영정사진과 같았다는 일본 택시 운전사의 여름밤 호러 이야기.
마치며
인간의 심리를 잘 안다는 것은 상대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아무리 인간의 심리를 잘 헤아린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심증일 따름이지 물증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오해’라는 것도 생기게 되는 것이다. 두루뭉술하게 사는 것이 편하게 사는 것이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생각이 깊어지면 왜 인간의 심리상태를 먼저 짚게 될까. 예리함일까 예민함일까? 이는 스트레스에도 영향을 끼친다. 인간의 심리를 잘 헤아렸다는 소세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위장병으로 생을 마쳤던 것일까? 나는 지금 근거 없는 인간의 심리상태를 또 분석하고 있다.
나도 문제로다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