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미학과 사유의 철학자
도시의 저녁산책을 즐긴다. 신도심에 살다 보니 자연 속의 산책이라기보다는 잘 정리된 인테리어 속으로의 산책이다. 전원의 목가적 풍경 못지않게 야경에 부조된 도회적 풍경에서도 마음의 충만을 느낄 수 있다. 때로는 멋진 카페의 테라스가 보이면 커피 한 잔을 들고 앉고 싶어 진다. 테라스는 시골 처마공간과 같은 도회적 쉼터의 풍경이 된다.
맨발의 무용수 이사도라 던컨과의 사랑을 지키지 못했던 러시아의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 그는 농촌의 목가적 저녁 풍경을 보고 주홍색 여명에는 달콤한 멜랑꼴리가 있다고 했다. 아내와 걷는 도시의 잿빛 멜랑꼴리에도 은은한 달콤함은 있다.
오늘도 걷기 미학과 사유의 철학자를 생각하며 아내와 저녁 산책을 나선다.
저녁 산책의 멜랑꼴리
최근 아내와 함께 휴대폰을 교체했다. 기본 설정을 바꾸지 않았더니 헬스 어플의 하루 걸음걸이가 표시된다. 잘 되었다 싶다. 아무리 레트로풍의 유행이 혼재한다지만 옛 어른들처럼 허리춤에 만보기를 지닐 수 없지 않는가.
산책하던 아내가 서로의 걸음걸이를 비교해 본다. 아내의 걸음걸이는 평균 10,000보 전후다. 병동 관리를 위해 병원 복도를 많이 걷는 편이기에 수긍이 가는 수치다. 나의 걸음 수치는 평균 2~3,000보 전후의 수치이다.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하루 종일 PC 모니터 앞에서 프로그래밍만 하는데도 왜 이런 수치가 쌓이는 걸까.
아무래도 거래처와 휴대폰 받는 움직임을 걷는 운동량으로 측정되는 것 같다.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걷기에 대한 미학은 많다.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를 읽다 메모해 둔 내용이 있다. 걷기는 활기가 없고 반복적이고 단조롭지만 권태에 대한 치료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걷기에는 규칙성과 리드미컬한 운동성이 존재하기에 공허한 동요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자극하는 사유의 시간이 된다는 것이기에 걷기의 반복은 무기력함 속에서 무언가 할 일을 찾을 수 있는 대안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칸트의 규칙적인 삶과 산책
매일 걸으며 사유했던 철학자 중에는 대표적으로 칸트가 있다. 칸트는 단조로움, 규칙성, 산책을 중시했다. 독서와 글쓰기 그리고 산책으로만 일생을 보냈다. 고향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을 만큼 여행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평생을 빚 없이 살았고 무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칸트의 삶은 규칙성을 빼고는 모험적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다. 나로서는 이해가 안 가고 꽉 막힌 생활이라는 생각하는데, 다행히 죽는 순간까지도 와인을 즐겼다고 하니 그나마 숨통이 트인다.
산책의 미학들
칸트의 일상을 방불케 하는 조정래 작가도 규칙적인 일상과 산책으로 유명하다. 특히 젊은이도 따라오기 힘들 만큼 속보로 걷는 것을 좋아한다는 TV 대담도 보았다.
상업적 벤치마킹을 잘하는 일본에서는 ‘철학의 길’을 교토에 만들어 관광지를 만들었다. 교토에 사는 철학자 니시다 키타로가 사색에 잠겨 산책을 했다는 데서 유래한 산책코스였다. 아마도 칸트의 산책을 흉내를 낸 것이리라.
스님들 또한 땅거미 진 저녁 산책을 좋아한다. 수도사들이 느낄 수 있는 무기력과 나태를 극복하려는 ‘아세디아’ 치유의 목적도 있을 것이다.
산책하면 마르셀 프루스트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는 두 가지 형태의 산책을 즐겼다. 하나는 도보에 가까운 수행의 산책이고, 다른 하나는 주위를 음미하며 걷는 산책이다. 전자는 조정래 작가의 산책이고 후자는 스님의 산책이다.
산책으로 사유하는 삶
버지니아 울프는 우즈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런던의 산책자’로 알려져있다. 그녀는 보람 있는 하루의 세 가지를 글쓰기와 독서 그리고 산책이라고 했다. 나에게도 산책은 하루 일과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의식이다. 낮시간을 마감하고 조용히 사색하는 밤시간을 여는 루틴이자 하루의 행복이다.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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