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공예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에서는 여주인공 고마코를 도자기에 비유를 했다. 원문을 번역한 내용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아름다운 문장이 보인다.
조그맣지만 매끄러운 입술
순백의 도자기에 분홍빛 붓을
살짝 갖다 댄 듯한 살결.
여인의 자태를 도자기에 빗댄 아름다운 번역문이다.
우리 도자기를 사랑한 야나기 무네요시
우리의 도자기 문화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일본인이 있었다. 유종열(柳宗悅)이었다. 처음 한자 이름으로 보았을 때는 한국인의 이름인 줄 알았다. 일본 발음으로는 야나기 무네요시인데 일본의 민예연구가이자 미술평론가이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제에 의해 경복궁이 헐릴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이때 야나기는 일본의 조선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각종 신문 사설에 조선의 궁궐 문화를 살려야 한다고 호소했다. 국가와 민족을 떠나 문화와 예술을 사랑했던 일본의 지식인이었다.
고려청자와 이조백자
우리나라 도자기 하면 고려청자와 이조백자이다. 야나기는 도자기뿐만이 아니라 조선민예 수집에도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공예의 아름다움은 전통의 아름다움이라고 했고, 민중의 생활 속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가치를 민예라는 단어로 함축했다.
조선공예의 미
몇 해 전, 야나기가 살았던 민예관에서 열린 <조선공예의 미>라는 특별전을 찾은 적이 있었다. 구글 지도를 보며 찾아 간 민예관은 도심 변두리의 조용한 주택가에 있었다. 입구에는 작품 안내판도 없었다. 야나기는 평소 관람객들에게 ‘알기 전에 먼저 보라’는 철학으로 안내판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신발을 벗고 야나기가 생전에 사용했던 마루에 올라섰다. 100년에 가까운 앤티크한 목조건물이기에 감상분위기가 특별했다.
전시실에는 조선의 자기가 은은한 조명에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생활 공예품 또한 아기자기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유리벽 너머 우리나라 장독대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무척이나 인상적이고 반가웠다. 도자기 외에도 강세황, 윤선도, 이정 등의 회화가 전시되어 있었지만, 도자기의 자태에 묻힌 듯한 느낌이었다.
야나기의 부인 가네코
본관 전시작품을 감상하고 건너편 별관 생가로 들어섰다. 집안 구조가 상류계층의 분위가 물씬 풍기는 구조였다. 별관에는 야나기의 부인인 가네코의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가네코는 1910년대에 음악 활동을 했던 소프라노 성악가였다.
당시 가네코의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 전곡 독창회 포스터가 걸려 있었고 음반에서는 가네코의 성악이 흘러나왔다. 이 층에는 야나기의 서재가 있었다. 서재의 분위기로도 야나기의 생활여유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문득 예술은 역시 부르주아의 것이었는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야나기 생가
야나기 생가의 전통 일본 목조 가옥 내부를 감상하다 말고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쏟아졌다. 아버지는 일제시절 일본에서 목공기술을 배웠다. 해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만든 시골학교의 관사나 면사무소 관사의 구조가 민예관의 구조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어려서 나는 아버지가 지은 목조건축물을 시시하게 생각했었다. 왜 좀 더 모던한 콘크리트 건물을 짓지 않고 고리타분한 앤티크풍의 목조 집만 짓는가 하는 아쉬움이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비록 일본풍의 건축이었지만 목조 미학을 생활 가옥의 매력으로 여겼지 않았을까를 짐작해 보았다.
민예관을 나서며
민예관을 나서는데 입장 때와는 달리 날씨가 흐려 있었다. 앤티크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날씨였다. 야나기의 민예관에는 비 오는 날에 찾아가면 좋을 것 같다. 아까 보았던 장독대에 빗물이 흐르는 상상하면서 도자기를 감상하면 감정이입이 한층 깊어지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