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생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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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생명력

수필의 생명력은 지름길 없이 진지한 자기 성찰과 고민, 느낌과 과정을 통한 글쓰기에서 나온다. 생명력 있는 글들은 강한 충성심과 진지한 노력을 통해 나온다. 글쓰기는 무엇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느끼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실전]수필 쓰기 핵심

글쓰기는 생각을 단련하고 풀어내는 과정

필자에게 수필 쓰기 요령을 묻는 이에게 빼놓지 않고 들려주는 말이 있다.

“당신은 정말 좋은 글을 쓰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십중팔구는 무슨 지름길이나 요행수를 알려줄 것 같아서인지 바투 무릎을 가까이하고 다가앉는다. 그러나 글쓰기의 지름길은 없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오직 진지하게 자기를 성찰하고 사물의 변화를 눈여겨보며 존재의 의미, 상관성, 인연들을 천착하는 길밖에는 없다.

짧은 글 한 줄에 승부를 건다

하지만 고기 그물에도 벼리가 있듯이 생각을 풀어내는 데에도 고리는 있다. 그것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단련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흔히 신문기자의 고수는 제목 붙이기에 있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카피라이터는 짧은 글 한 줄에 승부를 건다.

그만큼 치열성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하물며, 지어서 쓰는 잡문도 아니고 진솔함을 요구하는 수필 쓰기임에야 두말해 무엇 할 것인가. 더구나 그것이 남과 차별화하고 문학성을 갖추자면 몇 갑절의 고뇌와 절차탁마와 퇴고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역사 속 생명력 있는 글들

고대 철학자 세네칼은 “글쓰기는 분노와 슬픔 같은 마음의 고통의 치료제이다.”라고 했다. 이에 공감하여 하나의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수단으로 접근한다면 수필 쓰기는 실패하기 쉽다.

적어도 고흐의 말처럼 “진실로 나는 그림밖에는 그 어떤 것도 말할 수 없었다.”라고 한 것처럼 그런 절박함은 아니더라도 적당히 꾸미고 엮어서 내놓을 성질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수필을 쓰고 싶거든 마라톤 경주를 한다는 생각으로, 금방 냄비처럼 뜨거워졌다가 식어버리는 흥미가 아니라 진지한 접근을 해야 한다.

수필에는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

1998년, 420여 년 전 쓰인 편지글이 발견되었다. 고성이씨 선산이었는데, 내용이 너무나 절절하여 ‘세계를 울린 조선판 사랑과 영혼’이라며 세인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력 있는 글의 위력을 느낄 수 있다.

포은의 ‘단심가’, 충무공의 ‘한산도가’ 등도 지금까지 강한 충성심이 살아있다. 새삼 자야 김영한이 백석을 그리워하여 “나의 전 재산이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는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글의 생명력은 어마어마한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하며 글(수필)을 쓰고자 한 사람은 마음의 자세를 경건하게 가질 필요가 있다. 수필은 무얼 본 것을 쓰는 문학이 아니다. 느끼는 것을 쓰는 문학이다. 그 느낌에는 과정이 필요하다. 보고 느끼고 반성하고 자각하고 그것이 어떻게 해석되어 가치관으로 나타나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직사로 비치는 햇살과 그 햇살이 거울이라는 도구에 비쳐서 다시 반사되는 나오는 빛의 느낌이 다름을 잡아내야 한다.

수필 쓰기의 치열성

그것을 문학적 장치라고 한다면 글을 쓰면서 그것을 고민해야 한다. 모든 것은 드러냄으로써 시원함도 있지만, 살짝 가림으로써 신비감을 안겨줄 수도 있다. 문학적 장치에서 자연을 빗대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자연의 변화, 자연의 신비, 자연과의 연관 관계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글쓰기는 본래 어려운 것이다. 쉽다고 생각하는 순간, 교만해 지면서 피상으로 흐르고 가벼워지며, 고뇌하며 힘들게 쓸 때만이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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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쓰는 일상어

* 해당 내용은 임병식 저자의 [수필 쓰기 핵심]에서 해드림출판사의 허락하에 인용과 참조를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