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늦어도 11월에는


소설 늦어도 11월에는

‘늦어도 11월’ 에는 윤성희 소설가가 추천한 소설이었다. 통속적인 연애소설이지만 섬세한 문장의 결을 따라가 보면 전혀 다른 감정의 결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추천사에 읽게 된 소설이었다.

안나 카레니나

시간이 지난 ‘안나 카레니나’의 광고판 사진이 눈에 띈다. “가장 아름답고 매혹적인 뮤지컬 탄생”이라는 카피문에 시선이 멈췄다. 내가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을 때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스토리라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취향과 감상의 차이이자 나의 한계일 수도 있다.

안나의 죽음은 권선징악의 엔딩이었고, 단순히 톨스토이의 작품을 읽었다는 것만으로 의미를 두었다. 하지만 소설 자체는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연애 이야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스 에리히 노삭의 소설 

삶이 지루할 때 통속적인 연애소설을 읽으라는 말이 있다. 작년에는 파울로 코엘료의 ‘불륜’이나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이 인상적이었다. 올해는 한스 에리히 노삭의 ‘늦어도 11월에는’ 소설이 나에게 독특한 감성을 전했다.

늦어도 11월에는
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삭>

한스 에리히 노삭의 ‘늦어도 11월에는’ 윤성희 소설가가 추천하는 소설이었다. ‘통속적인 연애소설이지만 섬세한 문장의 결을 따라가 보면 전혀 다른 감정의 결을 만날 수 있을 것’ 이라는 추천사에 읽게 된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가족 앞에서 사랑을 선택하고 도피하는 이야기였다. 일반인의 정서로는 흔치 않은 로맨스를 그린 작품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긴장과 침묵이라는 현실의 무게에 가득 찼다. 뜨거운 사랑이 시간과 현실에 부딪힐 때 변하는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이 소설도 다른 연애소설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작가의 의도는 독자 스스로가 헤아려야 하는 숙제처럼 느껴졌다.

세계명작의 공통점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오랜만에 좋은 연애소설을 추천받아 읽었다는 느낌이 충만했다. 이 책의 번역가 후기도 ‘연애소설도 이쯤 되면 예술이구나’ 라고 스스로 감탄하면서 ‘세계고금의 불후의 명작치고 연애소설이 아닌 것이 없다’ 라는 말도 곁들였다.

번역가의 후기를 패러디해본다.

세계고금의 불후의 명작치고 연애와 죽음이 뒤섞이지 않는 작품이 없다.’

‘안나 카레니나’, ‘로미오와 줄리엣’, ‘위대한 개츠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 여러 작품에서 주인공은 죽음으로 이끌려간다.

중년의 사랑과 리스크

중년의 사랑에는 리스크가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사랑에 빠진다. 사람의 마음속에 두 가지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으로 나는 생각한다. 즉, 구심력이 작용하는 현실적인 방과 원심력이 작용하는 낭만적인 방이 따로 있기에 가슴과 머리로 밀당을 한다. 소설은 이런 배경에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도덕과 현실이 충돌하는 순간, 인간은 그 갈등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극기복례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갈등의 내면을 파헤쳐 보는 것이 연애소설의 묘미이다.

불멸의 사랑보다는 좋은 사랑으로

사랑, 어렵다. 이진숙 미술평론가가 했던 한 마디가 떠오른다. ‘불멸의 사랑보다는 좋은 사랑을 해야 한다’ 라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한스 에리히 노삭의 소설이나 안나 카레니나의 이야기는 우리의 사랑과 삶에 대한 고민을 자아내며 독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뮤지컬의 카피문처럼 ‘가장 아름답고 매혹적인 사랑의 탄생’ 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길 기대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