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과 취준생 딸의 색채


샤갈과 취준생 딸의 색채

샤갈과 취준생 딸의 색채는 상이하다. 탐구와 목표를 향한 딸아이의 취준 생활이 조급해하지 않는 샤갈의 밝고 희망적인 색채로 넘쳐 흘렀으면 좋겠다.

그렇고 그런 사이

몇 년 전 가을, 나 홀로 통영의 바다를 보러 갔다. 그날 밤 우연히 KBS 드라마 스페셜을 시청했다.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제목만 보고는 장기하의 노래 ‘그렇고 그런 사이’의 노래처럼 청춘의 밀당 이야기로만 여겼다.

캔맥주를 들고 소파에 기댄 채 별생각 없이 TV 드라마를 주시하는 데 예지원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딸 하나를 둔 가장이 직장 내 신입 여직원에게 호의를 보이다 방송 중 사고로 사망하고, 미망인이 된 예지원과 신입 여직원이 겪게 되는 애증의 드라마였다.

샤갈의 색채

샤갈의 <생일>이라는 그림이 소재로 등장하면서 나는 작가의 세밀한 심리묘사에 빠져 들었다. “마음은 있으나 현실에선 이룰 수 없는 아픔”인 샤갈의 작품을 메타포로 이어갔다. 그러다 문득 샤갈의 색채를 보면서 당시 미대생이던 딸아이의 색채가 생각나 그날 밤 나의 숙소엔 빈 맥주캔이 쌓여만 갔다.

샤갈은 어린 시절의 첫사랑과 결혼했다. 그의 작품은 동화적 요소가 강하다. 일찍 세상을 떠난 벨라와의 사랑의 잔향이 남아서일까 동심의 은유와 자상함이 느껴지는 색채다. 그녀와의 내러티브적 구성에 따른 환희의 색채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샤갈과 마티스

나는 아직 추상파, 입체파 등 현대미술보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고 흥행이 잘되는 인상파 그림을 좋아한다. 그러나 색채에서 만큼은 자연의 빛을 추구한다는 인상파 색채보다 마티스와 더불어 샤갈의 색채를 좋아한다. 즉, 야수파의 뚜렷한 색상의 적극성이 마음에 들어서다. 평소 앤티크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나의 취향에 대한 보색 심리일 거라고도 생각한다.

딸의 그림과 색채

서울 출장 중에, 딸의 방에 머무를 때가 있다. 딸이 그려놓은 그림들을 정리하며 나 홀로 조용히 습작 그림들을 들여다보는 경우가 있다. 드로잉은 어느 정도 기본이 잡힌 것 같지만 내 기준으로 본 붓감은 아직 미완성이다. 색채의 느낌은 내 취향과도 다르다. 마치 내 청춘의 색채가 느껴지듯이 가라앉은 분위기다. 겉으로 느끼는 딸의 성격과 다른 의외의 색채다.

요즘 취준생이 된 딸을 보면 나의 취준생 시절이 떠오른다. 그리고 생각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방황하고 아픈 것도 청춘이지만, 최신 유행의 길을 걸으며 20대 젊음과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도 청춘이다.

박범신의 소설 ‘은교’에서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라’고 질투 섞인 한마디를 했지만, 지나고 보면 찰나적인 젊음이기에 수돗물처럼 그저 흘려버릴 수는 없다.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소중한 젊음이다.

젊음의 색채로 물든 삶

요즘 젊은이에게는 철학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말은 이집트 파라오 시절이나 공자의 시절에도 있었고 우리들 시절에도 귀가 따갑게 들었던 ‘꼰대 소리’였다. 나는 딸아이에게 ‘카르페 디엠’을 외친다. 메멘토모리나 아모르파티는 사회에 나와 경험해도 늦지 않다.

탐구와 목표를 향한 딸아이의 취준 생활이 조급해하지 않는 샤갈의 밝고 희망적인 색채로 넘쳐 흘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