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교향곡을 들을 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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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

간밤에 베토벤 음악을 듣고 자기연민에 빠져 늦잠을 자고 말았다. 휴대폰 사은품으로 받은 무선 이어폰의 성능이 너무 좋아서였다. 이어폰만으로도 고음일 때 고음답게 저음일 때는 저음다운 선명하고 풍부한 음질의 성능에 매료되었다. 교향곡은 역시 볼륨을 높이고 감상해야만 연주의 질감이 빛난다.

철학자 칸트는 시간 개념이 투철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칸트 시계로 불리게 된 산책시간을 두 번 놓쳤다고 한다. (정말 두 번이었을까?) 첫 번째는 칸트가 그토록 흠모했던 장자크 루소의 <에밀>을 읽었을 때, 두 번째는 프랑스혁명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고 한다.

칸트의 시간 개념

나도 시간 개념이 강하고 엄격한 편이다. 칸트가 두 번의 산책 시간을 놓쳤듯이 나도 17여 년의 샐러리맨 생활에서는 두 번의 지각을 했다. (비유가 너무 억지 같다) 첫 번째는 폭설이 내린 신흥 주택 지구에 교통이 끊겨서였고, 두 번째는 베토벤의 음악에 빠져서였다.

Y2K 프로젝트(2000년 연도대응 프로그램) 참가로 도쿄의 KFC 본사에서 프로그래밍을 할 때였다. 출근을 준비하던 어느 날, NHK 아침 드라마를 우연히 시청하게 되었다.

NHK 드라마에 몰입

가녀린 소녀 고아로 자란 주인공은 어렵게 결혼을 하여 신혼생활을 꾸릴 즈음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 돌입한다. 졸지에 전쟁터로 투입된 새신랑이 얼마 후 전사했다는 전보가 도착한다. 전보를 받아 들고 새신부가 흐느끼는 장면에서 나도 먹먹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 출근 시간 여유가 있어 넥타이를 풀고 커피를 끓였다. 주인공처럼 다다미방에 앉아 아무 CD를 꺼내 오디오에 꽂았다. 때마침 흘렀던 베토벤의 음악이 드라마 분위기와 너무 흡사했다. 음악에 몰입되어 멍 때리기가 시작되었다. 얼마 후 머그잔의 바닥이 드러나고서야 출근 시간이 지각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감지했다.

베토벤 교향곡

두 번째 지각을 하게 된 그때 음악이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인 Allegretto였다. 베토벤 9개 교향곡 중에는 후일 제목이 붙여진 홀수번을 많이 듣게 된다. 3번 [영웅], 5번 [운명], 9번 [합창] 이다. 유명한 [황제]도 피아노 협주곡 5번이다. 그렇지만 홀수인 7번 교향곡은 제목이 없다. 짝수인 6번 [전원]에 제목을 빼앗긴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7번 교향곡은 듣더라도 1악장 정도에서만 건성으로 감상하는 편이다.

영화 킹스 스피치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7번 교향곡을 다시 듣게 된 것은 2010년에 개봉된 <킹스 스피치> 영화였다. 킹스 스피치는 한때 영국 역사상 최장기 재위를 했던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였던 조지 6세 이야기다.

베토벤 교향곡을 들을 때면 1

동서고금 불멸의 사랑 이야기를 할 때 빠지지 않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사랑을 위해 왕관을 내려놓았던 윈저공과 심슨 부인의 사랑 이야기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큰아버지였던 윈저공(에드워드 8세)은 영국 왕위를 계승했지만, 이혼녀였던 미국의 심슨 부인과의 사랑을 위해 재위 기간 1년이 채 안된 영국의 왕위를 내려놓았다.

스스로 영국 왕위에서 내려온 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동생 조지 6세는 말더듬이였다. 조지 6세는 말더듬이 왕이었기에 대중 앞에 서는 것과 연설에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비학력 언어치료사의 도움으로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제2차 세계대전의 히틀러에게 당당한 연설로 선전포고를 한다.

이때 영화의 엔딩이자 감동적인 연설장면에서 흐르는 배경 음악이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인 Allegretto이다.

생명의 고동을 느끼며

영화에서는 긴장된 연설이 포커스가 되다 보니 베토벤 배경음악이 평범하게 들린다. 하지만 오디오에서 실제 연주를 들어보면 팀파니가 연주되는 부분에 이르면 클라이맥스로 여겨져 가슴이 뭉클해지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베토벤 교향곡을 들을 때면 자기연민 속에서도 고동소리가 들린다.

격정이며 활력이며 생명의 고동이다. 이래서 러시아의 레닌은 ‘베토벤의 교향곡을 들으면 부르주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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