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묘한 일본어 뉘앙스와 유리코의 추억


미묘한 일본어 뉘앙스

언어에는 억양에 따라 뉘앙스가 달라지는 단어들이 있다. 미묘한 일본어 뉘앙스도 예외는 아니다. “좋습니다”라는 의미의 “이이데스(いいです)” 라는 문장이 있다.

누군가 나의 의향을 물어 왔을 때 “이이데스”라고 짧게 대답했을 때와 “이이데~스”라고 길게 대답했을 때의 의미가 달라진다. 전자는 사양하겠다는 NO의 의미요 후자는 동의하겠다는 YES의 의미다.

미묘한 일본어 뉘앙스1

뉘앙스 파악을 제대로 못하여 씁쓸한 웃음을 짓던 순간들이 있었다. 처음 일본에서 프로그램 개발할 때의 이야기다. 그날도 프로그래밍에 여념이 없었는데 일순간 목마름이 느껴졌다. 그러나 휴게실 다녀오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바쁜 시간이었기에 그냥 참기로 했다.

그런 상황에서 쟁반에 커피와 음료수를 들고 온 여직원이 커피 한 잔 하겠느냐고 물어왔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양 흔쾌히 마시겠다는 의미로 씩씩하게 “이이데스” 라고 대답했다. 키보드에서 손을 떼어 커피 잔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 쟁반의 커피는 내 앞에서 멀어지고 여직원의 뒷모습만이 야속하게 보일 뿐이었다.

당시엔 그 이유를 몰라 혼자 고개를 갸우뚱거렸으나 나중에 팀 리더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씩씩하고 짧게 대답하다 보니 사양하겠다는 의미로 전달된 것이었다.

미묘한 일본어 뉘앙스2

주말 저녁에 여유가 생겨 도쿄의 중심가인 신주쿠(新宿)로 혼자 구경을 갔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데 어느 골목에서 누가 나를 아는 척하며 앞길을 막는다. 일본어로 뭐라고 하는 데 잘 알아듣질 못하니 팸플릿을 건네준다. 펼쳐보니 스트립쇼를 하는 극장의 팸플릿이었다.

갑자기 무서움증(?)이 생겨 사양한다는 의미로 침착하게 “이이데스”라고 대답하며 뒤돌아 나왔다. 그런데 계속 나를 따라오고 있지 않은가. 침착하게 대답하다 보니 길게 발음이 되어 Yes라는 의미가 전달된 것이다. 귀찮아서 냅다 달려오고 말았다.

미묘한 일본어 뉘앙스3

이후로는 일본어 대신 영어로 “Yes”와 “No”로 대답하였기에 크게 혼동을 겪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의 시간이 흘러 ”Yes”의 의미였을까, “No”의 의미였을까 하는 조마조마한 고민을 했던 순간이 있었다. 유리코(百合子)와의 추억이다.

에어로빅의 매력

일본에서의 직장생활은 평일에는 잔업을 많이 했지만 별 무리 없이 적응을 잘해 나갔다. 휴일을 좀 더 알차게 보내기 위해 문화생활과 체력증진에 힘을 쏟았다. 문화생활을 위하여 문화예술회관 등을 다녔고, 체력증진을 위하여 헬스, 수영, 에어로빅, 사우나를 겸비한 헬스클럽에 다녔다.

어느 날부터 에어로빅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우주비행사의 체력 보강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에어로빅은 여성들만의 전용 운동인 줄 알았다. 에어로빅 스튜디오의 남녀 비율이 반반이 되어 운동하는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중년의 남성들이 제법 눈에 띄었기에.

한국의 에어로빅은 댄스에 가깝다고 느꼈는데, 일본의 에어로빅은 체조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어 나도 용기를 내었다. 차마 에어로빅 운동복까지는 입지 못하고 반바지 테니스복 차림으로 열심히 땀을 흘렸다. 운동이 끝나면 함께 땀 흘린 회원과 스태프가 모여 생맥주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 시간들 사이에서 에어로빅 인스트럭터인 유리코와 친해졌다.

유리코
나카미찌 유리코

인연, 나카미찌 유리코

국어 교과서에 실린 글 중에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글 중의 하나는 피천득의 <인연>이라는 수필이다. 그 글을 배우던 고등학교 때는 우리들의 연인처럼 각인되는 아사코와의 인연이 무척이나 아름답게 느껴지던 시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체육대학을 갓 졸업하고 윤기가 흐르는 긴 생머리의 유리코는 23세였고 나와 10살 차이였다. 피천득과 아사코가 10살 차이였기에 수필 속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아사코(朝子)는 백합처럼 시들어 가고 있었지만, 유리코(百合子)는 백합처럼 청순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을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미소>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종이 접기가 특기인 유리코는 여러 가지 손재주를 보여주기도 했다.

유리코의 이이데스

도쿄의 오오데마찌에 은행잎이 쌓이어가던 가을날, 나는 한국으로 돌아올 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평소 피카소 미술관에 다녀오고 싶었던 나는 유리코에게 전화를 걸었다. 피카소 미술관에 함께 다녀오고 싶은 데, OO역으로 몇 시까지 나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한 박자 늦은 유리코의 대답은 “이이데스(いいです)” 였다.

긴장했던 순간이어서였는지 Yes일까 No일까, 라는 뉘앙스를 놓쳤다. 그러나 되묻지 않았다. No라는 대답 일까 봐 그게 두려워서.

다음 날 아침, 내 마음은 긴장하고 있었다. 어제 유리코가 대답한 “이이데스”가 Yes였다면 미술관까지 즐거운 기차여행이 되겠지만, No였다면 캔맥주나 마시며 혼자서 담담히 다녀올 심산이었다. 기차역이 가까워질수록 시험 발표장에 가는 순간처럼 내 가슴은 뛰고 있었다. 드디어 구름다리를 내려 역구내로 들어섰다.

약속 장소로 눈을 돌리는 순간, 아~ 하는 탄성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의외로 유리코가 먼저 도착하여 개찰구에 두 손 모아 단정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어제의 대답은 Yes의 “이이데스(いいです)” 였던 것이다.

편지
유리코의 편지

조지 윈스턴의 겨울 속에 귀국

3년 반의 첫 번째 일본 생활을 마치고 귀국의 시간이 왔다. 나는 유리코에게 한복 차림의 인형과 조지 윈스턴의 <겨울>을 건넸다. 유리코는 고양이 인형과 사진대를 편지와 함께 나에게 주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이듬해 맞선으로 만난 아내와 결혼을 했다.

가끔 진부한 생활이 이어질 때 사람은 과거를 회상한다. 이럴 때 그리움을 동반한 추억이 아스라이 밀려오는 순간이 있다는 것도 지난 청춘의 선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늘도 추억에 잠겨 두 눈이 잠기려는 데, 언제 내 마음을 가로챘는지 “흥~” 하는 아내의 질투 서린 야유가 들린다.

황급히 태연을 가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보는 데 곁에는 아무도 없다. 환청이었나 보다. “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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