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낀 아침, 슬라브 무곡과의 조우
차가운 아침 공기를 머금은 시골 마당에 엷은 안개가 깔려있다. 평소처럼 PC를 켜고 KBS FM 라디오에 주파수를 맞춘다. 스피커를 통해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요즘 겨울과 어울리는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Slavonic Dance op. 72, Nr. 2)이다.
드보르작, 베를린 겨울의 메아리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은 단순한 클래식 음악이 아닌, 내게는 겨울의 깊은 감성을 담은 특별한 음악이다. 이 곡을 들을 때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베를린의 겨울 풍경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 그려지곤 한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자였던 사이먼 래틀(Sir Simon Rattle)의 앵콜멘트 때문이었다.

래틀의 한마디, “베를린의 겨울은 드보르작의 계절”
클래식 음악 팬들에게 연초는 특별한 시기이다. 전 세계에 위성 중계되는 빈 필하모닉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신년 음악회는 겨울 추위를 녹이는 따뜻한 선물과 같다. 오래전, 메가박스에서 극장용으로 중계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신년 음악회를 감상한 적이 있다. 그해 신년 음악회는 사이먼 래틀의 고별 무대였기에 더욱 특별했다.
그날, 앙코르 곡으로 연주된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은 왠지 모르게 멜랑꼴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래틀이 마지막 지휘봉을 드는 모습은 선입견적인 아쉬움이 가득했다. 마지막 앵콜 연주가 시작되기 전, 그는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말했다.
“베를린의 겨울은 드보르작의 계절이다.”
이 짧지만 강렬한 문장이 지금까지 내 마음속 깊이 새겨졌다.
슬라브 무곡과 겨울의 감성
왜 래틀은 베를린의 겨울을 드보르작의 계절이라 했을까? 아마도 슬라브 무곡 특유의 멜랑꼴리한 분위기가 추운 겨울 공기와 완벽하게 어울렸기 때문일 것이다. 드보르작은 이 곡을 통해 슬라브 민족의 정서를 담담하게 표현했지만, 그 속에는 깊은 슬픔과 애수가 녹아 있다. 마치 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드보르작의 음악은 텅 빈 공간을 채우는 묘한 매력을 지닌다.
나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겨울의 낭만적인 풍경 속으로 빠져든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베를린 거리를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어쩌면 래틀은 드보르작의 음악에서 베를린 겨울이 가진 쓸쓸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겨울의 선율을 낭만으로 채우다
나는 실제로 베를린에 가본 적은 없지만, 드보르작의 음악은 내게 베를린의 겨울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 같다. 음악은 단순한 소리가 아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일까,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을 들으면 사이먼 래틀과 베를린의 낭만적인 겨울을 상상하게 된다.
차가운 겨울, 따뜻한 커피 한 잔과 다시금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을 감상한다. 베를린 겨울 속을 거니는 듯한 낭만으로 겨울의 쓸쓸함을 따뜻한 감성으로 채워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