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슬픈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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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雨)요일의 낭만

월요일 오전 근무는 집중력이 떨어진다. 일요일 다음 날은 반드시 월요일이라는 분함 때문이다. 몰입해서 프로그래밍을 한 것 같지 않았는데, 정오의 알람을 듣고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서야 밖에 비가 내리는 것을 알았다. 모처럼 비다운 비였기에 사무실을 나와 우산을 쓴 채 내리는 빗줄기를 보며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고독한 낭만

고독한 낭만은 삶의 허무를 껴안는다고 했던가. 비의 낭만도 때로는 허무를 불러들인다. 얼마 전까지 야학에서 동서양 철학을 배웠던 교수님의 늦은 부음을 들었다. 허무 중의 허무가 인생이라는 것을 또 한 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요즘 ‘세상사 물거품’ 이라는 진부한 표현을 여기저기 남발하는 중이다. 아마도 나의 바이오리듬은 바닥을 헤매고 있는 것 같다. 프랜차이즈 프로야구팀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 카페에 앉았다. 우(雨)요일에는 아메리카노가 아닌 카페모카를 마신다. 고소함보다도 달콤함을 음미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에곤 실레의 에로티시즘에서도 어두운 그림자를 느끼듯이, 오늘은 카페모카의 달콤한 향에서도 텅 빈 고독이 느껴진다.

라파엘 코랭의 청춘

무언의 시간이 흐른다. 비를 좋아하고 비를 기다렸으면서 막상 비가 오니 외광파도 아닌 내가 다시 햇살을 생각한다. 마음의 캔버스를 세운다. 허무의 캔버스에 젯소를 바르고 눈부신 태양광선 아래 라파엘 코랭의 “청춘”을 그려보는 상상을 한다.

언제부터인가 버성기고 낡은 추억만이 쌓이어 가는 것이 느껴진다. 농익지 못한 나이브한 생각만이 장황한 진부함으로 다가선다. 화수분의 시어를 만들어가는 꿈의 편린들이 나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나는 그저 꿈들을 바라보고만 있을 따름이다.

 

내 영혼의 슬픈 눈 2
구로다 세이키의 <호반>에서 영혼의 슬픈 눈이 떠오른다.

 

구로다 세이키 호반

흐릿한 실눈 사이로 구로다 세이키 작품인 <호반>이 떠오른다. 몇 해 전, 구로다 세이키 전시회에서 감상했던 작품이다. 그림 속의 서글픈 눈매가 인상적이어서 사무실 책장에 올려놓고 자주 감상을 한다. 이형기의 詩 ‘낙화’에서 표현한 ‘내 영혼의 슬픈 눈’이 이런 눈매였던가를 헤아리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과 나혜석의 스승이었던 구로다 세이키. <호반>의 모델은 구로다가 평생의 반려로 삼았던 다네코라고 한다. 명문가 출신 구로다는 가족이 정해준 규수와 결혼했지만 파경을 맞고, 가족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다네코와 후지산 전경이 보이는 하코네로 온천여행을 떠난다.

그때 다네코를 그린 그림이 <호반>이다. 허락받지 못한 사랑 때문인지 다네코의 얼굴에는 어딘지 그늘에 서려있다. 그래서일까, 영혼의 슬픈 눈매가 느껴지는 그림이다.

내 영혼의 슬픈 눈 3
<호반>을 전시했던 도쿄국립박물관(우에노공원 내)

한때 나에게도 이런 눈매가 매력적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이제 눈매의 취향도 바뀐다. 눈매보다는 오히려 얼굴의 표정에 관심이 간다. 남자든 여자든, 자신감이나 유머러스한 이미지에 호감이 간다. 취향의 다양성인지 취향의 변심인지 모르겠다.

낭만의 현실

다양성이든 변심이든, 취향은 분위기에 따른 수시변동이기에 결론은 없다.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은 값싼 낭만보다도 분위기 쇄신이다. 어제를 위해 오늘로 미룬 숙제를 오후에는 마쳐야 하기에.

아, 낭만은 정녕 현실을 이기지 못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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