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창 임방울과 시인 박용철의 여인
광주송정역 임방울 전시관
광주 지하철 1호선의 광주송정역에는 국창 임방울 선생 전시관이 있다. 서울행 KTX나 SRT를 타기 위해서는 임방울 전시관을 지나게 되는데, 가을이 시작되고 찬바람이 살갗을 스치면 서러운 한을 품고 사라져 간 예술인의 여인들을 생각나게 하는 곳이다.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는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상상 속의 아바타가 되어 자신의 분위기로 연출된다. 해피엔딩의 경우에야 달콤함에 젖지만 새드엔딩의 경우에는 누군가를 원망하는 기분을 갖게도 한다. 오늘은 국창 임방울과 박용철 시인의 여인들을 생각한다.
임방울의 어린 소리꾼 시절과 그의 사랑
미성을 지녔다는 임방울은 평소 무대에서 음담에 가까운 농담을 많이 해서인지 배비장전이나 가루지기타령이 어울릴 것만 같다. 하지만 서편제와 비슷한 느린 진양조의 가락이 느껴진다. 한 여인과의 애틋함 때문일 것이다.
어린 소리꾼 임방울이 부잣집 딸을 사랑했다. 성인이 되어 그녀와 얼마간의 사랑을 나누기도 했지만 득음을 위해 사랑하는 여인 곁을 홀연히 떠난다. 어찌 보면 득음을 핑계로 식어가는 사랑을 외면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임방울을 잊지 못했던 그 여인은 상사병에 가까운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음에 이른다.
임방울의 애틋한 통곡의 노래 “추억“
한 여인의 흠모의 정을 애써 기피했던 임방울은 싸늘한 여인의 시신 앞에서 통곡한다. 그때 즉흥적인 단가를 만들어 불렀다는 노래가 <추억>이다.‘앞산도 첩첩하고’로 알려진 노래인데 가사가 애달프다.
“야속하고 무정한 사람아
황천이 어디라고 이렇게 쉽게 떠나느냐.“
라고 통곡하는 데 직접 들어보면 장송곡에 가까운 통곡이다. 야속하고 무정한 사람이 임방울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본인이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광주송정역에서 국창 임방울을 생각했다면 한때 내가 신혼생활을 했던 동네에서는 시인 박용철을 생각했다. 동네 한편에 박용철 생가가 있었기에, 추운 겨울날 밤 그곳을 지나칠 때면 그의 아내의 서러운 야곡이 들리는듯 했다.
박용철의 문학 업적과 애증의 여인들
박용철은 만석꾼의 자제였다. 요즘 표현으로 금수저다. 일본서 독문학을 전공하면서 영어까지 능통했다고 하는 데 특히 수학의 천재였다고 한다. 절친 김영랑 시인을 만나 문학을 시작했지만 시작품보다도 시론에 더 관심이 많았다. 카프(KAPF) 문학으로 어수선할 때도 정치적 이데올로기에서 한 발짝 물러나 순수 서정시와 출판 문학에만 관심을 두었다.
박용철은 두 여인과의 애증의 벽을 극복하지 못했다. 첫 여인은 자신의 아내였다. 집안에서 정해준 여인과 결혼했으나 ‘백치와 어떻게 한평생을 사느냐’며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끝내 이혼당한 첫 여인은 광주의 동명동에서 평생 수절하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백치 아디다를 연상케 하는 한 많았던 그 여인에게 수절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는 첫 부인과 헤어진 그는 서구적 이미지의 다른 여인을 흠모했다. 그러나 그 여인과도 사랑의 결실을 이루지 못한다. 박용철이 허약한 건강에 쓰러졌기 때문이다. 그는 결핵으로 시한부 인생이 되어 병마를 이기고자 자신의 아픔을 시로 썼다.
박용철의 시와 노래 “나두야 간다“
‘밤기차로 그대를 보내고’, ‘이대로 가랴마는’처럼 독백의 시를 남겼다. 이는 본인이 당초 내걸었던 시문학의 정서와는 다른 분위기였던 것이다.
지금도 나는 박용철의 시 <떠나가는 배>의 일부를 인용해서 불렀던 김수철의 <나도야 간다>를 좋아한다. 내 청춘의 눈물을 자기 최면으로 멈추게 했던 주술적인 노래와 시였기에.
“나두야 간다
나두야 간다
젊은 세월을 눈물로 보낼 수 있나.“
임방울과 박용철의 사랑과 예술정신
임방울과 박용철의 사랑에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임방울이 야속하고 무정했다면 시인 박용철은 한 여인에게 야속함과 무정함을 넘어 한스러움까지 안겼다. 하지만 현실과 운명에 도전적으로 살았던 그들의 예술정신만큼은 높이 사고 싶다. 그들은 신파조든 자기 합리화든 예술의 관용으로 눈감아줄 수 있는 위대한 예술을 남기고 갔기 때문일 것이다.